우리 동네 백두산 정복기
조그만 우리 집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침대에 누우면 옆으로 길게 난 창밖으로 하늘이 보인다는 것.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서른이 넘어서야 애국가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를 깨달은 나는 요즘 자주 하릴 없이 누워 있다.
그러다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파아란 하늘이 자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았다. 이걸 어떻게 붙들 수 있을까.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주말에 산에 갈래? 아빠한테도 물어봐."
"갑자기 왜? 아빠야 당연히 좋아하겠지."
지난주 토요일, 눈을 뜨자마자 왠지 비장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은 진짜 괜찮겠냐고 여러 번 묻더니 휴대폰을 톡톡 두드리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높이가 700m라는데?"
"... 언제 그렇게 높아졌지? 거의 백두산인데?"
"...?"
약속이 있어서 같이 못 간 남편에게 무리하지 말라는 당부를 받으며 집을 나섰다.
어쩐지 들뜬 얼굴의 아빠가 만나자마자 물었다.
"야, 뚠뚠이, 네가 웬일이냐!"
"흥."
꼬마 김밥 2인분을 사들고 산으로 갔다. 다행히 날씨가 참 좋았다. 일용할 식량은 아빠 배낭에 다 넣었는데 걸음은 엄마랑 내가 더 무거웠다.
"너는 왜 산에 오자 그래서."
"흥."
그렇게 몇 년 만에 등산이 시작됐다.
서늘한 나무 그늘을 천천히 걸었다. 중간쯤 올라오니 (다리가 아파서) 잡생각이 없어졌다. 다음 발은 어디를 디딜까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데 내려오던 아저씨가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
"아따, 아가씨, 머리에 랜턴 쓴 줄 알았네."
급해서 못 말리고 나온 앞머리를 구루프(일명 머리 뽕)로 말고 올라갔는데 빛을 받아서 반짝였나 보다. 뒤따라오던 엄마는 웃다가 주저앉았다.
정상에 무사히 도착해 기념사진을 한 판 찍고 조금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도라에몽 배 같은 아빠 배낭에서 먹을 게 끝도 없이 나왔다. '이걸 다 누가 먹으라고' 싶었지만 허기진 위장으로 술술 들어갔다. 아빠랑 사이좋게 밤 막걸리도 나눠 마셨다. 나른해진 우리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갔다. 주말마다 혼자라도 꼬박꼬박 산에 가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리하고 일어나 슬슬 걷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나무 위에서 다람쥐가 도토리를 먹고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 휴대폰 액정으로만 보던 귀여운 털 친구를 라이브로 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올라오면서 주웠던 도토리 다섯 알을 꺼내서 나무 아래로 던져주었다.
가벼워진 배낭만큼 홀가분한 얼굴로 아빠가 물었다.
"다음 주에 또 올래?"
"아니."
아빠를 이해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다음은 겨울, 혹은 내년 봄, 아니면 내후년(?)쯤을 기약하며 집에 돌아왔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알찬 하루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