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장서사

평일 오전의 세상

짧은 분당 기행 22.10.05

by 치슬로

(22.10.04)


임플란트 수술을 해서 대체휴무를 냈다. 대체휴무를 나름 꼬박꼬박 써온 것 같은데 아직도 남은 걸 보면 새삼 여름에 정말 많이 고생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부모님도 안 한 임플란트를 젊은 내가 해서 자그마치 130만원이란 돈이 깨졌고 (30대는 보험이 안 됨)고막에 때려박히는 드릴 소리는 섬뜩했지만 아무튼 수술은 잘 마무리 되었고 약은 정말 꼬박꼬박 먹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당부를 뒤로 한 채 병원을 나섰다.


가을날 평일 오전의 날씨는 참으로 쾌청했다. 나는 병원 진료를 다녀오면 반드시 그걸 맛있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보상해주는 버릇이 있는데, 당분간 입도 안 벌어지고 잘 씹지도 못 하니까 오늘은 푸딩이 좋겠단 생각으로 푸딩이 유명한 카페를 찾아 버스를 타고 떠났다. 마취가 다 안 깼기 때문인지 지도를 보면서도 길이 헷갈려 똑같은 횡단보도만 두어 번을 오갔지만 무사히 도착했다.


도착한 곳엔 아쉽게도 푸딩은 모두 나가고 없었고 (평일 오전 11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는데?) 예약하면 받아볼 수 있다는 훈훈한 주인장의 멋쩍은 웃음을 뒤로 하고 다른 시그니처라는 메론빵과 커피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카페가 위치한 곳은 분당 구미동 빌라촌 빌라들 중 하나. 1기 신도시도 이제 지어진 지 30년을 훌쩍 넘어가니 여기저기선 재개발 이슈로 온갖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지만 단지 안은 고요했다.


코오롱, 삼부, 삼성 3개 건설사가 함께 지은 이곳은 90년대 초 유행한 벽돌 외벽과 더불어 아트막한 높이에 단지 안을 빼곡히 메운 나무와 온갖 식물들로 마치 생태공원에 온 느낌이었다. 어차피 분당에서 집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고, 커피를 들고 탈 순 없기 때문에 커피나 다 마시자 하고 시작했던 동네 산책이었는데, 들어가 걸을수록 평온이란 단어가 몸을 입고 나타나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 답사를 하면서 이곳에 담긴 설계 철학과 비하인드를 들으면 참 좋을텐데, 하며 물러 나왔다.


단지를 빠져나와 미금역 방향으로 걸어가는 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즐거워하는 소리와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모두가 서울로 판교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난 평일 11시와 정오 사이의 시각. 자주 머무를 수 없는 그 시간에 오래된 신도시의 아름다움은 잠시 꽃을 피우는 듯 했다.


같은 1기 신도시인 일산 키즈이다 보니 나는 판교나 위례 같은 첨단 신도시가 줄 수 없는 감성과 느낌에 조금 더 민감하다. 신도시가 '구도시' 가 되는 30년의 시간동안 나무와 풀은 자라고 사람도 그와 더불어 시간을 머금고 자란다. 그 아우라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테헤란로 건물 숲 사이에서 누군가는 사람과 컴퓨터와 씨름하는 사이 어떤 세상은 그런 건 모른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존재한다. 그 벌어진 시공간 틈으로 단풍이 들고, 아이는 자라고, 내가 결국 먹지 못하고 온 푸딩과 소금빵이 만들어진다. 나는 아무 걱정 없이 길을 걸으며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어쩌면 환상처럼 존재하는 시공간을 위해 나는 오늘도 일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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