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장애가 극도로 도진 어제는 무척 힘든 하루였다. 한참 쓴 일기는 브런치 오류로 죄다 날아가서 결국 올리지 못했지만, 조금 더 안정된 오늘은 어제의 기억과 깨달음을 되돌아보며 일기를 써본다.
불안이란 세상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다. 적절한 정도의 불안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시도때도없이 나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면 내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제 상담하며 내가 세상과 맺은 관계들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내 주된 감정은 '공포'. 상처받을까 두렵고,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을까 무섭고, 온전히 내맡기지 못하는 그런 공포로 가득한 세상이 내가 오랜 시간 바라보고 느낀 곳이었다.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상이 여전히 험한 곳이라도 내가 관계 맺는 방식은 달리 할 수 있다.
모든 평가는 상대적이며 불완전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경험, 열등감과 우월감의 경계 어디에 서서 존재와 경험, 시간을 평가하고 판단한다.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고 모든 것을 가진 존재는 더더군다나 영원히 될 수 없기에 우리의 평가와 판단은 온전할 수 없다. 그 평가와 판단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걸 이해하고 아는 순간, 나는 세상과 맺는 관계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 불완전한 기준에 더이상 예전처럼 휘둘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신앙의 프리즘으로 세상과 나를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믿는 신은 온전한 존재이고, 그와 닮아가려는 시도를 할 때야만 비로소 완벽에 가까운 눈으로 무언가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판단보다는 그저 알게 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음받은 존재이고,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은 어느 존재 안에 자리잡은 신의 완벽함일 것이기 때문이다. 판단은 모자름과 넘침을 재어 어떠한 결론을 내리는 행위인데, 여기엔 특별히 모자름이 없다. 모든 존재가 결점을 가지면서도 완벽하다. 그 자체가 신의 형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말했던 것 같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 라고.
세상은 계속 결점과 틈을 주목할 것이다. 과거의 상처와 결점을 보게끔 하고, 완벽의 가능성은 끊임없이 인간적인 노력을 하여 겨우 얻을까 말까 하는 것으로 보여지게 된다. 그러나 완벽함이 이미 내 안에 내재된 것이란 걸 알게 되는 순간, 완벽은 인간적 노력의 영역을 넘어선다. 이미 가지고 있는 걸 노력해서 얻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되찾아 제자리에 되돌려놓기만 하면 된다.
불안을 인식했던 어제는 힘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쁘기도 했다. 굉장히 이상한 표현이지만 이제 결승점에 거의 다 왔다! 란 마라톤 주자의 기쁨 같은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세상과 맺는 관계는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걸 고민해 보게 되었단 것은 드디어 내가 본질을 다룰 준비가 되었단 뜻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뿌리에 도달하기 위해 땅을 뚫고 들어가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세상과 매번 좋은 관계만을 맺을 수는 없다. 내가 정말 강남 100억 건물주가 아닌 이상에야... 아니, 건물주도 세상에 맘대로 할 수 없는 건 많을 거라 이러나 저러나 세상과의 관계를 정의하긴 힘들거다. 여튼 이 질기고 변덕스런 관계를 끊어버릴 순 없지만 조금 더 주도권을 가져가볼 수는 있다. 매일 눈치도 못챌만큼 시도하다 보면 이 관계는 어제보다 더 말랑해질 것이다. 어느 날은 내가 뒤집어도 보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 회사 시스템 전체 비번 바꾸라길래 아주 긍정적인 의미를 가득 담아 바꿨다. 여호수아가 성벽 돌듯, 나도 매일 마음을 담아 치다 보면 저 거대한 두려움의 성벽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갈라지지 않겠는가. "쳇, 별거 아니었네." 라는 싱거운 소리를 하는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