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앤트메리, 유희열 소품집, 페퍼톤스
가끔 수원에서 친구를 만나고,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다 유신/창현고등학교 정류장을 볼 땐 갑자기 오래 전의 일이 환상처럼 펼쳐진다. 두 번째 수능을 보던 아침, 사람이 없어 휑한 유신고 정문을 지나며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이 적혀진 흰 현수막만 찬 바람에 나부끼는 풍경 앞에 나와 엄마가 길고 긴 언덕길을 걸어가고 있고, 어느 순간 엄마가 이제 여기서부터는 네가 혼자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고, 나는 제발 끝까지 같이 가 달라고 간청하던 그 모습이 생생하기 때문에.
사실상 수능을 망치고 수시를 모두 떨어진데다 무슨 배짱인지 가,나,다 군을 모두 상향지원 해버린 나는 '재수'를 순순히 수긍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절대로 재수 같은 건 안 할 거라고 입으로는 말하고 다녔지만, 이미 나에게 고등학교 3년이란 내 스스로가 서서히 우울에 잠식해 가는 과정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붙은 대학이 없어 쓸쓸히 졸업식장을 뒤돌아 나오는 나의 앞에 부모님은 다시금 '나의 명문대 입학' 을 결심하셨으니, 본격적인 재수란 어쩌면 당연히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기번호 3번을 받았지만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말하는, 고3 담임선생님의 애써 나를 달래려던 근심섞인 얼굴은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전화가 모두 끊긴 어떤 날을 지나, 나는 서초동 재수학원촌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 해 서초동에 새로 생긴 재수학원에 입학하면서 나는 특목고 출신이란 출신성분(?! 덕에 운좋게도 입학시험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가뜩이나 못하는 수리영역 때문에 짓밟힌 자존심에 입학시험까지 본다면 내 멘탈은 그대로 바스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수능 성적에 맞춰 위에서 두 번째 반에 들어가게 되었고, 개그맨인지 영어 선생인지 모를 담임 선생님과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시절이 마냥 행복했노라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매일 나를 교실 책장 뒤에 숨어서 울게 하던 고등학교와는 달리 재수학원은 나를 그런 식으론 울리지 않았다. 수능을 일주일 남긴 내 생일 날 책상 앞에 친구들이 사다준 생일 선물이 하나 둘 불어나던 기억부터, 매일 아침마다 국어 선생님과 했던 성경 공부 모임, 그리고 토요일마다 반 친구들과 교대 맛집 투어를 하던 기억까지, 뭐랄까 고등학교에서의 '경쟁' 과는 다르게, 재수학원에서는 뭔가 특별한 연대가 날 감싸줬던 것 같다.
그 기억들과 함께 음악 역시 나를 붙들어줬다.
'나의 눈물을 그치게 한 음악' 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매일의 강행군을 울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든 이 음악들은 이제는 그때만큼 많이 듣진 않지만,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게 만드는 이상한 마력 역시 가지고 있다.
'여름날' 은 재수 시절 아침 6시마다 나를 깨운 핸드폰 알람 음악이다. "너의 꿈은 아직도 어른이 되는 걸까 - " 라는 부분을 들으며, 빨리 이 유예된 어른 노릇은 그만 하고 진짜 어른! 이 되고 싶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렇게 정신차리고 보니 이제는 3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버렸지만...
가끔 이 곡을 집에 틀어 놓으면 엄마는 그렇게 내 재수시절 생각이 나서 마음이 저며 온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na_THZF_rUbOHoECzfYwhWcZjKXIFi28I
문제 풀면서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페퍼톤스 앨범. 'Salary' 를 들으며 월급날엔 원래 그렇게 기분이 좋은가? 처음으로 궁금해하게 되었다. 그냥 듣고, 또 듣고, 듣다 보면 수학 문제도 풀려 있고, 앨범 트랙도 모두 끝나 있었다.
오래 들어온 노래들이 대개 그렇듯 마이앤트메리를 어디서 알았는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음반은 아마도 내 인생에서 최초로, 최고로 사랑했던 록 음반이었으리라. 이미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속하는(속하는지는 오늘 처음 알았는데;;) 음반이기도 하고.
재수생이 앞으로 할 사랑에 대해 꿈꾸게 만들었던, 지금 기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노래들이 여기에 담겨 있다. "너와 함께라면, 난 멋진 사람이 된것만 같아" 라는 가사의 With나, 그냥 시종일관 설레게 하는 Sweet도 그렇고. 외로운 날에 듣는 특별한 사람까지. 정작 내가 이 노래들의 아름다움은 누구와도 제대로 나눈 적이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앞의 두 앨범을 너무 많이 듣다 못해 재수 하반기부터는 마이앤트메리의 Circle을 듣기 시작했다. 제일 좋아했던 트랙은 (그리고 지금도) '다섯 밤과 낮'.
어쩌면 싱거운 결말. 결국 두 번째 수능에서는 원점수를 20점 넘게 올렸으나, 또 수리가 발목을 잡는 바람에 (....) 드라마틱한 역전극은 쓰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공부하는 동안 덜 울고, 좀 더 행복해졌다. 그것만으로도 된 것 아닐까?
매일 찾고, 오랫동안 사랑해 온 것들은 우리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 그것이 잠시 지속될 찰나의 설렘이든, 말없이 서 있는 나무 아래이든, 믿을만한 사람의 곁이든... 돌아보면 나는 음악이 드리운 날개 아래 서러운 날이든, 기쁜 날이든 묵묵히 공부를 해나갈 힘을 얻었던 것 같다.
조금은 긴 시간을 버티어 나가야 할 때, 다음에 올 시기를 위해 한 시기를 말 없이 견뎌야 할 때, 또 어떤 음악을 듣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