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연 넓히기 03.30
에너지를 끌어올리려면 뭘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매일 새로운 음악 듣기. 생각해보니 한 달 넘게 해서 한 번 회고를 해볼 때도 되었다. 매일 새로운 음악을 듣는다고 해서 호랑이 기운이 샘솟고 전에 없던 용기가 막 넘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뭘 얻었냐? 매일 조금씩 세계로의 외연을 넓혀가는 사람이 되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뭔 소리냐면... 이제 재밌는게 알아서 굴러들어오길 바라는 도둑놈 심보에서 알아서 내가 더 재밌는 걸 찾겠다는 개척자의 마음으로 옮겨갔다고나 할까 !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율리시즈의 시선> (1995) 를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거대한 레닌 동상이 밧줄에 칭칭 감긴 채 도나우 강을 떠내려가는 롱테이크를 꼽지만, 나는 주인공 A가 사라예보에서 만난 시네마테크 관장의 유언과도 같은 대사가 아직까지 기억에 많이 남는다.
"I live my life in ever widening circles that rise above things. I probably won’t come last, but I’ll try. I circle around God.”
나는 이 세상의 것들을 초월하는, 계속하여 넓어지는 원의 삶을 산다. 물론 그 원의 삶을 끝까지 완성하진 못할 것이지만, 해볼 것이다. 나는 신 주위를 돈다...
이 대사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구를 차용한 것이란 건 뒤늦게 알았지만, 단편적인 앎을 초월하는 이해와 외연의 확장- 이러한 개념들이 너무나도 마음 깊이 다가와서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게 적어놨었다. 그랬다. 이 영화를 본 2017년엔 거의 매주 영화를 보러 다니면서 이 말을 철저히 삶으로 실천하려 노력했었지만 그 이후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한동안 나의 '외연 넓히기' 는 중단되었다.
톰 요크가 라디오헤드였어?
그러다가 2020년이 되어서야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방법의 하나로 새로운 음악 듣기를 추천받았다. 나는 맨날 듣는 것만 듣는데, 뭘 듣지? 그래서 추천해준 분의 취향을 한번 따라가보기로 했다. 아하, 락을 좋아하시는구나. 포스트락? 프로그레시브 락? 이건 뭐지... 하고 N.EX.T 2집을 듣기 시작하다가, 불싸조 음원을 만선에서 사서 들었는데 이 사람들은 정말 보통 사람들이 아니구나!!! 란 걸 깨달으며, Pink Floyd의 <The Dark Side of the Moon> 을 설거지 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또 뭘 엄청 들었던 것 같다.
부끄럽게도 라디오헤드 곡은 <Creep> 밖에 제대로 모르고, 톰 요크는 진짜 요즘 나온 가수인 줄 알았던 나는 우연히(?!) 톰 요크가 라디오헤드 멤버인 것을 알게 되면서 저 위의 굉장히 바보같은 질문을 친구에게 어느 날 하게 되었다(...) 당연히 친구는 너는 좀 혼나야 한다며 난리가 났고, 나는 반성하는 의미로 라디오헤드의 명반 <OK COMPUTER> 을 꼭 다 듣겠다고 얘기했다.
OK COMPUTER은 정말 모든 곡이 다 좋았고, 알고 보니 어릴 때 열심히 읽었던 <은하수를 히치하이킹하는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에서 영감을 얻은 곡들이 있어서 더 재밌게 들었다. 그렇게 일하면서, 글을 쓰면서 하루에 하나씩, 많게는 하루에 한 앨범씩 음악을 다 들었다. 그러다 내가 지금 어떤 뿌리에 가 닿는 느낌이 들어서, "배철수의 음악캠프 엄선 70년대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일하면서 틀게 되었다. 듣다 보니 책이나 신문 기사에서 글자로만 접했던 레드 제플린, 에어로스미스 등등의 음악들이 마음으로 조금씩 와닿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이거 엄청난 수확 아닌감.
음악도 사람처럼 서로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해서 아직까지 자주 찾아듣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렇게 하다 보면 세계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도 더 넓어지리라. 요즘엔 핑크 플로이드의 <The Great Gig in the Sky>가 종종 생각나서 찾아 듣는다. 그래도 술탄 오브 더 디스코 음악을 틀어놓고 동생과 난리부르스를 추며 돌아다니는(...) 건 언제까지나 제일 재밌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야 보여요
음악을 매일 찾아듣게 되며 발견한 것 중 하나는 내 친구들은 엄청난 취향 부자였다는 거였다. 이미 J는 내가 이제야 듣기 시작한 음악들을 거의 모두 듣고 알고 있었고, M은 고등학생때부터 린킨 파크와 에미넴 노래를 노래방에서 부르는 선구자였다는 걸.(린킨파크 faint 노래방에서 불러본 적 있습니까? 껄껄) 누구는 클래식에 통달했고, 누구는 인디 음악에 모르는게 없고... 나는 외연을 넓힐 방법을 아주 거대하고, 대단한 것으로부터 찾으려고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친구들에게 요즘 뭘 좋아해? 요즘 뭘 들어? 요즘 뭘 보니? 물어보고 함께 즐기면 되었던 것을.
그래서 요즘 하는 일들은 세상에 내가 아직 모르던 재미난 것들을 하나씩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Cymbals의 명곡들, Capsule의 큐트팝 시절, 그리고 중고등학생때 미친듯이 찾아 듣던 시부야케이 음악들 이야기에 맞다 맞아!! 하면서 공감해줄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내일도 매일 새로운 음악 듣기- 외연 넓히기는 계속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