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무방비로 맞는 봄, 03. 27
코로나 때문에 한 달 넘게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사무실 출근은 옵션이 된지 오래다. 오늘은 오랜만에 출근을 했고, 마스크 때문에 화장은 안 했지만 트렌치코트에 검은 구두를 신고 금색 링귀걸이를 짤랑거리며 진짜 어른처럼 회사에 갔다.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일동제약사거리를 지나자 갑자기 나의 지루한 출근길 풍경에 봄의 색채가 밀려들었다. 누군가가 버스에서 내리는데, 잠시 열린 문 사이로 바람에 온통 벚꽃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고 만 것이다.
순간 심장이 덜컥, 하고 내려앉았다. 거의 자동으로 '나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는데...' 라는 말이 한숨처럼 나왔다. 그 버스 안에 있던 사람 중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샛노란 개나리와 진한 철쭉이 군락을 지어 "봄이야 봄! 봄!" 하고 외치는 건 뭐 그럴 수 있겠다 싶은데, 벚꽃은 언제 와서 언제 예고없이 갈지 모르지 않나. 그들은 외치지 않고 속삭이듯이 자기가 왔음을 말하니까, 우리 같은 둔한 사람들은 꽃망울을 한껏 터뜨리고 나서야 '이미 너 눈치도 못 채는 사이에 봄 다 와버렸음' 이라는 벚꽃의 은근한 메시지에 경악하게 되는 것 아닐까 모르겠다.
사무실 앞에 당도하니 아니나 다를까 지난주만 해도 코빼기도 안 보이던 목련과 개나리가 무채색 가지 위에 한껏 움을 틔웠다. 그리고 매일 양재천 산책을 다니며 봤던 그 수많은 나무들은 이제야 자기 정체를 밝히고 있었다. '나 사실 벚나무였어' 라고. 아마 이들은 다음주면 장관을 이루리라. 그러면 나는 무조건 회사에 올 수밖에 없다.
한편 코로나로 인한 단체감염 우려 때문에 벚꽃놀이는 전세계적 금기가 되었다. 바리케이드 뒤에 벚꽃만 한껏 피어있는 묘한 모습 그리고 그거라도 보겠다고 통제하지 않은 '개구멍' 을 찾는 사람들, 통제된 캠퍼스의 벚꽃을 생중계해주는 방송까지 사람들은 모두 멈춰버린 땅 위에서 한 줌 서정과 시간이 흐르는 감각을 되찾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코로나가 모든 것을 집어 삼켜도 여전히 봄은 오므로.
정신차려보니 다음주가 벌써 4월이다. 벚꽃이 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은 더이상 무언가를 이토록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꽃은 지고, 영원을 약속했던 사람들은 떠나니까. 그럼에도 그 덧없는 아름다움을 바라는 우리 마음은 빼꼼 문을 열고 있다가, 속수무책으로 밀려드는 봄에게 당하고 마는 것 같다.
그러게, 벚꽃은 누구랑 본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