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5
생각해보니까 누구에게도 한 번도 내 플레이리스트를 제대로 공개해본적은 없는 것 같다. 요즘 가요 같은 것도 거의 잘 모르고 (부끄럽지만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 이름은 다 알아도 얼굴하고 잘 매칭은 못 시킨당) 내 취향이 마이너하다고만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보통 내 음악 듣는 스타일은 꽂힌 한 곡/앨범만 죽어라고 듣다가 한 200번쯤 듣고 질려서 새로운 곡이나 앨범을 찾는 식이다. 그러다가 또 한 몇년 전쯤 100번씩 들었던 걸 몇개씩 집어와서 다시 또 듣는 방식이다. 그렇다보니 집에서 내 음악을 큰 소리로 틀어놓고 있다 보면 동생이 언니 제발 다른 곡으로 넘겨..... 라고 말하는 걸 꽤나 자주 들을 수 있다.. :)
이 플레이리스트엔 이전에 이야기한 포스트락이나 슈게이징은 제외하고, 순수 100번 이상 들은 최근 곡이나 2년 이상 내 플레이리스트에 들어있던 곡들 위주로 선별했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nd9KZHw-kTXeWmixTuAKt5m29SdbMzT08
나는 보컬 홍효진씨의 목소리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생애 첫 영화였던 <아파트 생태계> 의 엔딩곡에서 처음 들었다. 정말 너무 멋진 목소리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Room306의 보컬이셔서 그때 이후로 열심히 듣기 시작했던 것 같다. Room306의 두 정규 앨범 중 'At Doors' 와 '겹' 모두 좋아하지만 '겹' 을 조금 더 많이 듣긴 한다. 제일 추천하고 싶은 건 7번 트랙 '침묵.'
Alan Parsons Project는 SNS에서 팔로우하던 어떤 저자 분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Alan Parsons Project의 <Days are Numbers> 를 듣고 너무 아름다워서 우셨다고 해서 듣기 시작했던 게 처음이다. (나도 처음 듣고 그 뒤로 한 500번은 들은 것 같다...) Alan Parsons Project 음악들은 가사도 철학적이고 서정적이라 참 좋지만 오케스트라적인 측면이나, 악기의 솔로 부분이 특히 강조되는데 이게 또 나를 미치게 하는 포인트다! Silence and I도 듣다 보면 흘러나오는 호른 소리가 참으로 마음을 저미게 한당.
최근에 약간(?) 충격 받은건 Alan Parsons Project도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분류된다는거... 록이란 생각을 전혀 안 하고 들었는데 ㅋㅋㅋ
https://www.youtube.com/watch?v=pok8H_KF1FA
요즘 빌보드에서 엄청 뜨는 랩퍼 Doja Cat의 곡이다.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곡인데 자존감이뭔가 바닥을 찍는 것 같고, 우울할 때 노래의 힘을 빌어 텐션 업! 될 수 있는 노래다. 당당함이 필요할 때 종종 듣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XaCrQL_8eMY
위의 곡과 마찬가지로 내가 못난 사람인 것 같을 때 텐션 업을 위해 듣는 두 번째 음악이다. Juice가 너무 흘러넘쳐서 라구 소스 같다는 가사가 있길래 도대체 무슨 뜻인가... 했더니 자신의 흘러넘치다 못해 끈적한 매력을 Juice라고 표현했던것. 자신과 다른 사람의 모든 몸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몸긍정주의자인 그녀를 보면 그냥 너무 신나고 행복해진다. 노래를 들으면서 가끔나도 매력이 내 몸 주위로 번쩍번쩍하는 걸 상상해보곤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Z-3J0LB_knY
이것도 버스에서 라디오 듣다가 알게 된 곡으로, 20대 초반에 열심히 들었던 노래였던 것 같다. 기억이 가물가물... 가사의 내용처럼 갑자기 어느 날 내가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걸 확 자각하게 되었을 때의 아득함이란.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나고 있는 거지?" 라는 가사의 첫 마디가 참 절묘하다.
Capsule은 이제는 EDM을 열심히 하는 일본 듀오(나카타 야츠타카, 코시지마 토코)이지만,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큐트팝이란 그들 나름의 독보적인 장르를 개척한 그룹이기도 했다. 참고로 나카타 야츠타카는 일본 아이돌 Perfume과 캬리 퍄뮤퍄뮤를 탄생시킨 엄청난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6집을 끝으로 EDM으로 전향한 뒤론 그들 음악을 잘 안듣지만, 큐트팝 시절 음악만큼은 아직도 많이 찾아 듣는다.
덕질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그 당시 제일 열심히 보거나 듣던 것으로 이메일 아이디를 정한다거나 하는 경험들이 있을텐데, 내 아이디인 'twinklepopp'은 바로 이 음악에서 딴 것이다. 그 외에 Idol Fancy, RGB, Music Controller, Plastic Girl 도 참 좋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HJtZLJFGJtg
https://www.youtube.com/watch?v=w_6Xg653H6g
중3 때부터 13년째 듣는 음악.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외고 입시 광풍이 한국에 몰아치던 시기에는 중학생이 새벽 3시까지 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자습을 하다가 귀가하는 일이 정말로 있었다. 그렇게 4시간 정도 자고 좀비처럼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으려니 몸이 제대로 버틸 재간이 있을까? 당연히 없었다. 이 음악을 발견한 그 날도 너무 힘들어서 양호실에 가서 잤는데, 잠에서 깨니 양호 선생님은 안 계시고 열린 창문 틈으로 햇살 한 줄기가 새어 들어오고, 흰 커튼이 나부끼며 라디오에서 이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그 장면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마치 나를 향한 위로처럼 느껴져서 제목도 모르던 그 음악을 미친듯이 찾기 시작했다. 당시 MBC 드라마 <소울메이트> OST가 큰 화제가 되고 있었어서, 일단 이 중에 있을지도 몰라 하면서 찾았는데 진짜로 있어서 좀 신기했던 경험이 있다. 이 곡의 원곡은 Barry White and Love Unlimited Orchestra의 'Love's Theme' 으로 원래는 가사가 없는 곡인데 토키 아사코가 리메이크 하면서 가사를 붙인 것 같다. 원곡도 상당히 좋지만, 밝고 산뜻한 분위기의 곡으로 새로이 편곡되면서 들을 때마다 더없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이 곡은 추후에 내가 Toki Asako가 보컬로 있었던 Cymbals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곡들 하나하나를 고르고 이에 얽힌 이야기를 쓰니 나는 내 속에 이렇게도 할 이야기가 많았나? 새삼 감탄하게 된다. 삶을 스친 음악에 대한 기억은 유독 명확하고 또렷한 편이어서, 사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짝사랑하던 친구의 MP3 속에 들어있던 음악도 상당히 많이 기억이 난다. (그 중 몇개는 지금도 열심히 듣는다)
계속 스타트업이나 지하철 얘기는 안 쓰고 음악 얘기만 쓰는데 한 번 언제까지 가는지 두고 봐야겠다. 요즘 나는 내 삶 속에 음악이 차지하고 있었던 영향력의 범위와 그것이 담았던 이야기의 크기에 매일 놀라는 중이다. 누가 이 이야기를 매일 읽어주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일부를 지면에 공유하고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