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장서사

음악 수집의 기술

귀 기울여 듣는 순간 발견하는 것들 04.07

by 치슬로

얼마 전 플레이리스트를 살피다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도대체 어디서 처음으로 알게 된 거지? 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그 음악들의 기원은 오전 11시의 학교 양호실이라던가, 잠이 들기 직전 한남대교 위를 건너던 광역버스 안에서라던가, 나름의 역사와 장소성을 모두 갖고 있었다.


세상엔 나보다 음악을 잘 듣고 좋은 음악들만 오만 군데에서 쏙쏙 골라오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래도 내 음악의 기원에 대해 한번쯤은 써보고 싶었다. 그동안 정말 독특하고 좋은 음악들을 수집한 장소들은 대개 생각 외의 장소가 많았다.



1. 정말 레어한 미국 인디 음악이 듣고 싶다면 - WeWork 화장실


음악을 수집하기 좋은 장소가 위워크 화장실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싶겠지만 정말로 위워크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은 한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곡, 그것도 미국 인디 신의 신예들이 만들어낸 좋은 노래들이 꽤 많다.


사실 위워크에선 늘 음악을 튼다. 라운지나 사무실 공간은 항상 사람들이 있고 모여서 회의를 하거나 일을 하니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화장실은 언제 가든 음악이 나온다.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몇시간 주기로 같은 곡이 반복되고, 몇 주 주기로 곡 세트 전체가 바뀌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언젠가 이 음악의 출처들이 너무 궁금해서 찾아보다가 이 플레이리스트는 뉴욕에 있는 위워크 본사에서 누군가가 고심해서 만든 후, 세계 여러 지점으로 내려보내는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위워크에서 일하지 않지만 몇년 전 을지로 지점에서 일할 때엔 가만히 화장실 창문 난간에 걸터앉아서 을지로 풍경을 바라보는 걸 참 좋아했다. 그러다가 좋은 음악이 나오면 SoundHound 앱을 켜서 음악을 인식시키고,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들여다봤다. 그때 수집해서 들은 음악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요즘도 여전히 이 곡들을 한국에서 별로 듣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https://youtu.be/XxBmBdrHvlQ

ALASKALASKA - Patience

https://www.youtube.com/watch?v=W4GJTjBSh68

Common Body - Lucy of the Draw

2. 한국의 숨은 명곡이 듣고 싶다면 - 퇴근길 광역버스 맨 앞자리


집은 경기도지만 강북에서 대학교를 나오고 회사를 다닌 나는 거의 10년 넘게 광역버스를 탔다. 나와 같은 경기도민들은 광역버스를 타면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들이 크게 2가지 정도 되는데, 하나는 줄을 안 서는 곳에서 광역버스를 탈 때, 버스가 서는 자리를 정확히 맞춰서 제일 먼저 버스에 오르는 '눈치게임 잘 하는 법' 과 광역버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푹 자는 법이다. 아! 하나 더 있다. 자다가 자기가 내릴 정거장 하나 전에서 눈 뜨는 기술까지...


여기다 나는 내 기술을 한가지 더하고 싶은데, 바로 숨은 명곡 찾기 기술이다. 보통 버스 기사님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라디오를 켜고 운행을 하시는데, 이 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곳이 바로 버스 기사님 바로 뒷자리인 왼쪽 맨 앞자리다. 7시가 약간 넘은 퇴근길, 모두가 노곤노곤해져 한남대교를 넘어설 즈음 다들 서서히 잠들어갈 시각에, 도시의 빛에 반짝이는 한강을 지나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할 무렵에 들려오는 노래들을 가만히 들어보라. 이상하게도 나는 이 시간과 장소에서 자주 명곡을 만났다.


https://youtu.be/fbqdiH20jBw

노영심 - 별걸 다 기억하는 남자 (정말 너무 좋아하는 곡....)

https://www.youtube.com/watch?v=J9_J9AbPgEI

강허달림 - 춤이라도 춰볼까 (앨범 버전을 아무리 찾아도 없다 ㅠㅠ 흑)

https://www.youtube.com/watch?v=CsMm38wg5KE

김국환 - 아빠와 함께 뚜비뚜바 (가사를 음미하다보면 행복해지다 짠해진다.. )

3. 세계를 여행하는 음악들 - 발길 닿는 대로 떠난 곳


공덕 뒷골목에 독일식 치즈케익을 구워 파는 카페가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난 후 어느 날, 학교에 가서 교수님을 뵙고 난 후 어디선가 소문을 들은 그 곳에 가야한다는 묘한 충동에 휩싸여 학교에서 공덕까지 걸어서 지도를 보며 그 곳을 찾아갔다. 그날은 드레스덴에서 왔다는 주인 아저씨와 독일 이야기를 한참 하고, 아저씨가 갓 구워낸 치즈케익과 커피를 먹고 마셨다. 근데 그 날 커피와 케익도 역대급이었는데 아저씨가 틀어준 음악도 정말 역대급이었다. 독일 분이 왜 독일 노래는 안 틀고 다른 나라 음악을 틀었는지는 의문이다만...


너무 힘들었던 때 불쑥 떠난 하와이에서는 하와이안 팝이란 걸 배웠다. 일주일 내내 말도 안되는 행복 속에서 머물던 기억을 계속 되새기기 위해 다녀와서도 한참을 들었던 음악.


https://youtu.be/g1KnLr80bfo

캐나다 퀘벡에서 활동하는 가수 Diane Tell의 Faire à nouveau connaissance

https://www.youtube.com/watch?v=rT1txCjuTxI

J'adore Venise · Loredana Bertè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ost이기도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SgcCev5F1hA

Nohelani Cypriano - Lihue



4. 씁쓸한 젊음의 음악 - 진심은 밤의 거리에서


3년 전 한창 영화를 볼 땐 거의 1주일마다 홍대나 을지로에서 영화 친구들을 만나서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맛있는 걸 보고 실컷 웃고 떠들었다. 우린 약간 취기가 올라 기분좋아진 상태에서 을지로3가를 내일의 걱정 따윈 없는 젊은이들처럼 걷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자주 영화를 보던 서울극장 어귀를 걸으며 과거에 우리를 불타오르게 했던 것들을 열심히 이야기했다. 그 중에는 음악 얘기도 있었는데, 나는 가만히 제목을 기억해 뒀다가 집에 가서 꼭 그것들을 찾아 듣곤 했다.


가끔 영화 친구들 모임에는 '객원' 들이 끼기도 했는데, 집이 멀단 이유로 멋진 그들과 더 함께 있겠다는 수작(?)을 마음이 내키는 대로 부리지 못한 날엔(사실 합정에서 살았던 1년 정도를 제외하곤 항상 나는 막차 때문에 물러나는 입장이었다.) 혼자 걷던 홍대 거리가 유독 쓸쓸하기도 했다. 그때 영화를 보고 난 후 폐업 직전의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들었던 음악이 왜 그렇게 기억에 남던지.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음을 기념하며 그 씁쓸함에 도취해버리고 싶다면, 취기가 올라 밤 거리를 걸을 때 옆 사람의 입과 작은 술집의 스피커에서 무슨 음악이 나오는지 기억해 두라.


https://www.youtube.com/watch?v=O9-4CPz_zvY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 나의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GaLsJSU9LMs

아침 - 불꽃놀이

사실 이 모든 장소성과 시간이 맞춰지더라도 음악은 내 맘에 드는 형태로만 찾아오지 않을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에릭 로메르의 영화 <녹색광선> 의 주인공처럼 무엇이 보이지 않더라도 항상 포착할 준비를 하라. 그녀에겐 운명의 남자를 찾는 것이 미션이었지만 우리는 운명의 음악을 찾을 거니까!

재빠르게 가사와 음을 외워 옮겨 적을 일말의 여유는 구비해두는 것이 좋다. 정말 좋은 음악들은 날 기다려 주지 않고 금방 지나가버리고 말기 때문에 순간 집중해 듣는 능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 스타일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이라면 멈춰 서거나 번쩍 손을 들어 스피커 가까이 폰을 뻗어 한참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부끄러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음악검색 기능은 그리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은 가게 주인에게 능청스럽게 음악의 제목을 묻는 것도 좋다. 그러면 아무리 차갑게 보이는 이라도 오래된 아이맥 속 아이튠즈 목록을 뒤져보곤 당신에게 말해줄테니.


사람은 떠나고, 장소는 사라지고, 그날의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 완벽했던 조건을 기억하고, 그 속의 음악을 기억하는 이상 언젠가 그것들은 당신을 찾아온다. 약간은 다른 모습으로라도, 꼭.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음악을 만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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