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장서사

친구의 작업실에 갔다

05.19

by 치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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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나는 또치의 작업실에 정말 많이 신세를 졌다. 어떤 날엔 하릴없이 앉아 성능 좋은 스피커에 음악을 걸어놓고 일을 하고,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고 난 어떤 날엔 열띤 칸 취재 후기를 듣고 <기생충> 토론을 한데다 공중파 9시 뉴스에 출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 외에도 맛있는 거 시켜 먹고, 수다 떨고, 인생상담 받느라 눈물콧물 다 빼고, 다른 워크숍 듣고, 내 크라우드펀딩 워크숍을 진행하고, 친구들이랑 모여서 영화 보고.. 적어보니 생각보다도 정말 많은 추억이 있었네.


여튼 그 작업실이 계약이 끝나 마포에서 을지로로 이사를 했고, 첫 순간을 놓칠새라 우리는 순대국을 먹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그의 작업실로 자리를 옮겼다.


을지로를 정말 백방으로 헤집고 다니다 가까스로 만난, 원하던 조건들이 딱딱 들어맞는 곳이라고 했다.


대개의 을지로 건물들이 다 그렇듯, 좁고 가파른 계단참을 한참 빙빙 돌아 올라가야 그 작업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당최 이전의 용도를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복잡한 실내 구조하며(듣자하니 사우나와 회계사 사무실이 차례로 거쳐 갔다고) 넓은 옥상이 무려 2개. 아직 정리가 안 되어 어수선했지만 그 정돈되지 않음이 오히려 매력을 배가시키는 공간이었다.


마침 비가 억수로 내린 다음날이라 우리는 '미세먼지 0' 의 기록적인 하늘을 보며 옥상 위 낚시 의자에 걸터앉아 맥주와 나쵸, 라면을 먹었다. 세상에 찬 바람을 직방으로 맞으면서도 이렇게 기쁠 수가 있나.


우리는 여름이 되면 여기서 풀 파티를 할지도 모른단 얘기와 선베드를 가져다 놓고 알아서 오일 가져와서 태닝을 하자는 얘기, 옥상 결혼식ㅋㅋㅋ 하자는 얘기를 했다. 난 중간에 북악산 보고 남산이라고 해서 타박을 받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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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딱히 내가 가지게 될 사적, 공적 공간에 대해 상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무실은 다 똑같을 거고, 집은 아파트 혹은 단독주택일거고... 알아서 취직하고 알아서 결혼해서 잘 살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자라면서 내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공간들과 그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예측할 수 없는 공간과 공간 속의 생활상을 들여다 보는 일이 정말 즐거워졌다. 틀에 박히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이런 공간과 삶을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무명' 의 공간이라고 했던가.. 가물가물..


이번 작업실은 총 4명이 같이 쓰고, 아직 정돈도 다 안된 상태에서 벌써부터 대관 요청이 들어온다는데 앞으로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굴 만나게 될지 정말 기대가 된다. 이 공간 속의 수많은 방과 문, 옥상이 어떤 쓰임을 갖추게 될지도.


아직 나는 창작을 업으로 삼는 정도까지는 아니라서 '내 작업실' 이란 공간을 쉽게 상상하기 어렵지만, 언젠가 작업실이든 집필실이든 스튜디오든 뭔가를 만나게 된다면 오늘 만난 작업실처럼 상상의 여지가 많은 공간을 만나면 좋겠다.


축하해 또치!

우리 또 재밌게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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