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장서사

약물인간

11.10

by 치슬로

9월에 이어 또 재발한 식도염과 위기능저하로 내시경을 보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 새벽에 자다 깨서 토한 이후로 SSRI도 안 먹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몸상태를 보고 먹어야 하겠다. 그 외에 넣어야 하는 약도 생각이 났다. 벌써 이것만 해도 세 개째군.


살면서 한의원 단골이 될 줄은 몰랐지만 2년 전쯤 지긋지긋하게 안 낫던 염증을 침으로 일주일만에 나은 이후로는 아플 때마다 계속 찾게 된다. 또 먹지 말라는 밀가루랑 고기 먹었냐...(나는 8체질 중 '금음' 체질이라 한다) 는 타박을 들으며 침을 맞고, 침 효과가 잘 나게 해준다는 환을 털어넣고 초등학생처럼 폴로 캔디를 두어 개쯤 슬쩍 들고 나온다. 멀리 침 맞으러 혼자 온 것에 대한 나름의 보상이랄까?


친구와의 약속 자리에서 최근 아팠던 것들을 얘기하고 나니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걸 알게 되었다. 대개 위염, 편두통, 질염, 방광염, 수면장애나 불안장애 중 하나 정도는 공존하는 존재 정도로 여기게 되었더라. 누가 그렇게 아픈 걸 달고 살다가 비싼 유산균 꾸준히 챙겨 먹고 싹 나았다더라, 루테인이 어떻고, 오메가3이 어떻고, 종합비타민은 어디꺼가 좋고... 하는 이야기들이 한참을 오갔다.


나의 피 속에는 오늘 몇가지 약 성분들이 돌고 있을까. 약과 침 덕분에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오늘날 20대 끝자락 직장인의 초상인가 싶기도 하고. 그제 새벽에는 속이 너무 답답해 깼는데 잠은 안 와서 그전엔 별 관심 없던 밀가루 대용 음식들과 채식 식품들을 마구 찾아봤다.


안 아프고 싶다.

체질식 같은거 안 해도 됐으면 좋겠다.

근데 저 메밀 식빵은 맛있겠네.

커피 마시고 싶다.

그래도 미국 같은 데 안 태어나서 다행이다. (5년 전 미국에서 위염 걸렸을 때가 제일 끔찍했다. 제산제만 주고 버티라는 학교 클리닉.....)


쌀알만한 알약과 겨우 한 뼘 되는 침에 오늘과 내일, 앞으로의 컨디션을 모두 의지해야 할 따름이니 마음은 자연히 겸허해진다.


그래, 이건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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