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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렛 Nov 16. 2022

직장인 A의 오래된 두 감정

그녀는 해가 바뀌면 18년 동안이나 한 직장을 다닌 베테랑 직장인이 된다. 말이 좋아 베테랑이지, 사실 속을 알고 보면 그녀의 18년은 한땀 한땀 눈물로 이어붙인 누더기 옷 같은 모양으로 만든 시간들이다. 회사의 안락한 제도들을 이용해서 공부를 했고, 아이를 낳았고, 아이 키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회사를 다닌 시간, 다니지 않았던 시간이 비등할 만큼 그녀는 때로는 직장인으로, 때로는 휴직자로 꽤 오래 살았다.


그녀는 몽상가이다. 수시로 잦은 소망들을 키워갔고, 소소한 발자국들을 남기며 직장인 말고 제 꿈을 키워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믿었다. 한 번 태어났으면 한 번 큰 일을 해봐야한다고 여겼다.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직장을 때려치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년으로 넘어가기 몇 달 전에 17년 그리고 몇 개월차에 사표를 한 번 썼다가 거둬들였다. 그러면서 감정의 땅끝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살아나는 중이다.


그녀가 수면제 여러 알을 동시에 먹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상상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을 때조차 그녀는 돈벌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배우자는 꼬박꼬박 월급을 모으고 있었고, 제 몸을 누일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며,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던 직장에서도 역시 월급을 주고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월급 노예이며, 매달 들어오는 마약이구나 싶어지는 장면이다.


자신이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그 직장이 고맙고, 싫고, 밉고, 자랑스러운,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괴로운 감정을 안고 어쨌든 조금 더 다녀보기로 힘들게 결심하던 중에 일은 벌어졌다. 어쩌면 '퇴사'라는 낱말에서 곧바로 '승진 걱정'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 난리를 치고 다니네 못다니네를 커텐처럼 열었다 닫았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보니 곧바로 '인사 평가' 시즌이 다가왔다. 허탈하고, 민망하고, 안타까웠다.


그녀는 같은 팀 직원들에게서도 상호 평가를 받아야 할 입장, 직속 상사인 팀장에게서도 하위자 평가를 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그렇게 막 휘두를 수 있는 '사직서'라는 카드를 내가 쥐고 인생을 개척해나갈 줄 알았던 직장인 A는 곧바로 평가 대상자에 올라 자신이 한 모든 행동과 말을 어떤 방식으로 주워담아야 할 지 염려하는 샬레 속의 관찰대상자로 전락했다.


하지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덕분에 먹고 살아야 하는 이 땅의 수 많은 직장인들에 대해 더이상 미련한 인생이라거나, 꿈을 무시하는 비겁자들이라고 폄하하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만들어나갔다. 매일 아침 출근해서 마주하는, 닭장 속의 닭이나 사육장 안의 어떤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이라고 조용히 묵념하듯 자리에 앉아 피씨의 전원을 켜던 우울한 마음을 거두었다. 대신 그 자리엔 시간 맞춰 출근하여 흔들림 없이 제 업무를 지켜내고 만들어나가는 그들을 향한 작은 숭고함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가지 시나리오가 펼쳐진다. 승진 심사 마지막날이다. 출근해서 최대한 산뜻한 마음으로 피씨를 켜고  단계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사내 시스템으로 접속하던 그녀에게 산뜻한 발걸음으로 팀장이 다가와 회의실로 가자는 손짓을 한다. 그녀는 어떤 말을 듣게 될까?




[A 시나리오]

"00씨, 내년에 승진 할 수 있게 올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점수를 주었어요. 복직한 지 얼마 안되었는데 지켜보니 잘 하더라구요. 지금처럼 성실히, 꾸준히 하면 내년엔 좋은 결과 있을거에요."


[B 시나리오]

"복직해서 적응하느라 힘들었죠? 아이들은 학교 잘 다녀요? 지난번에 아프다고 한 건 잘 회복되고 있어요?

...

좋은 점수를 주고 싶었는데 얼마 전 제출했다가 거두었던 서류도 있고, 휴직기간이 워낙 긴 편이어서 다른 직원들과 균형을 맞추려면 이번에 아쉽지만 00점수를 줄 수 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여러 조건에서 불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차츰 아이들이 크면서 상황이 나아질거니 조바심 내지 말고 긴 안목으로 회사 생활 이어가길 바랄게요."




아무도 모른다. 그녀가 A에 처해야 행복해지는지, B에 처해야 원만해지는지. 그저 그녀는 평소에 꼼꼼히 인생설계하길 좋아하던 버릇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면 한참동안 에너지를 끌어모아야 하는 체력을 가지고 있지만, 최대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어떤 방향으로 꼼지락거리면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는지 생각하고 시도하고 펼쳐볼 뿐이다.


그녀는 후배의 추천으로 시작한 런닝을 시작한 지 이틀이 되어 온 몸에 근육통을 안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근육통은 꽤 많이 사라져있지만 그 자리엔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반만 가지고픈,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늘 애가 달아있는 자신의 내면을 그윽히 바라본다. '소설'이라는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디뎠지만 어찌된 것이 그 세계가 신기해서 단편소설 한 편 씩을 읽을 때마다 어둡던 세계가 점차 밝아지듯 시야가 넓어지는 현상을 체험한다.


책 속에 파묻히면 어떻게 되는지, 책만 알고 삶은 모르면 어떻게 되는지를 그녀는 최근 몇 년간 배웠고 경험했다. 글 안에서도, 글 밖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직장 밖에서도, 그녀가 그녀의 매력을 찾아가길 바란다. 그녀는 털실 같은 사람이다. 한 뭉텅이의 털실. 그 털실로 제 삶을 엮어나가고, 기워나가고, 모양내 갈 것이다. 손가락으로 하는 뜨개질도 있고, 뜨개 도구를 이용할 수도 있으며, 털실 그 자체를 접착제로 붙여서 뭘 만들어볼 수도 있고, 종이 위에다가 작품처럼 배치할 수도 있다.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한 가지 방법을 정해두고 그것대로 안 된다고, 미리 그려놓은 설계도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침울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직장인A로서의 삶을 오늘부터 꼭 끌어안을 것이다. 시간과 행동을 분리하는 법도 배우고, 평일과 주말을 다른 자아로 사는 법도 배울 것이다. 그 경계선에서 때로는 시간 여행자가 겪을법한 혼란도 느끼겠지만 잠시뿐일 것이다. 그녀는 모드 전환에 점점 강해질 것이다.


이렇게 혼자 뿐인 새벽 시간과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 엄마에게 달려오는 시간의 사이에,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쉴 수 있는 업무 시작 이전 시간과 오전 9시 일과 시작 시간 사이에, 가장 글 쓰기 좋은 태블릿 피씨를 열기 전과 후의 시간 사이에, 그녀는 매번 밥 하던 주부에서 소설가 지망생으로, 할 줄 아는게 별로 없는 평범한 일반인에서 내가 맡은 분야에선 전문가인 사람으로 촘촘히 변해가며 살 것이다.


아침해가 떠오른다. 그녀는 직장인이 될 준비를 한다. 제 몸을 단장하고, 두 아이의 등교 준비를 한다. 아이들을 먼저 교문 앞에 내려주고, 그녀의 직장으로 향할 것이다. 주차장에서 회사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다짐할 것이다. 이 하루 하루가 모여서 나는 고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많은 흔들림, 혼란 속에서도 분명해지는 것이 생기는 것이 인생이라고, 어떤 인생 시나리오가 찾아와도 방법은 있다고. 그녀의 하루를 열렬히 응원하며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그녀의 삶과 내 삶은 결국 둘이 아닌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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