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하무인 :
눈 아래에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방자하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업신여김을 이르는 말.
업무 중에 만나는 사람의 스펙트럼이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다. 정해진 업무를 정해진 사람들과 규정에 맞춰서 하고 있다. 그러다 가끔 협업을 위해서 멀찍이 떨어져있던 사람들과 새롭게 만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면 가끔 깨끗한 쌀 알갱이 사이에 돌이 섞인 것처럼 당황스런 경험을 하기도 한다.
나이가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입사 선배가 있다.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고 검토해서 일을 맞춰나가고 있었는데, 마지막 조율 단계에서 딴소리를 하는 것이다. 억지를 쓰고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질러댔다. 이렇게 물렁하게 고분고분하게 응대하다가는 일이 그르치는 것은 물론 내가 끌려다니다가 생고생 하겠다는 것이 훤히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딱 중심을 잡고, '안 된다! 그렇겐 못 한다!'고 강하게 이야기를 했다.
어쩌다보니 탁 트인 사무실, 수백명이 함께 근무하는 건물 안에서 언성을 높이게 되었다. 예전이라면 과거의 나라면 상상도 못했을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따박따박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 키우면서 별의 별 일을 다 겪고 수습해나가다보니 절로 강인해진 것일까? 어느 쪽이든 나이를 헛 먹지 않고 집에서 더이상 이불킥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내심 기쁜 언성높임이었다.
물론 자리로 돌아와서도 한참을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시간이 필요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거의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하고 왔구나! 이럴수가, 이런 날이 오다니!'
글을 쓰는 지금 다시 생각해보아도 마음이 뿌듯하다. 난 정말이지 후회의 여왕, 인내의 달인이었는데 말이지.
자리로 돌아와서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해가기 시작했다.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정돈해서 상사에게 빠르게 보고했고, 역시 내 머리 하나보다는 더 나은 둘의 머리에서 합쳐진 아이디어로 더 세련되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까지 찾아냈다. 이것도 멋지다. 수습까지 했구나, 정말이지 대단하다.
과거엔 어설프게 공격하려고 폼만 잡고 제대로 해야 할 말도 못한채로 자리로 돌아와서 분한 마음을 억누른 때가 많았다. 허무하게 돌아와서 아무리 속으로 분을 삭여봐도 가라앉지 않았다. 퇴근 후 자려고 누워도 부들부들 몸만 떨리고 애꿎은 눈물만 자꾸 흘렀을 뿐, 해결된 일은 아무것도 없고 억울함만 자꾸 누적되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해야 할 말을 해야 할 자리에서 마땅히 내도 될 목소리로 내고 왔다. 그 상황을 꼭 글로 남겨두고 싶어서 살짝 주위를 둘러보기까지 했다. 내가 마치 주인공처럼 대사를 하고 있을 때 주위 풍광은 어떤지, 주변인들의 눈빛은 어떤지까지 정말로 관찰하고 싶었고 그 풍경을 살짝 둘러볼 마음의 여유까지 있었다. 남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고 제 말에 빠져있는 상대방의 눈을 쳐다볼 수도, 도리어 그 눈빛을 무시하고 내가 시선 두고 싶은 곳을 찾아서 그와 거리감을 둘 줄도 알게 되었다.
중간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후배를 앞에 두고도 오히려 그를 두둔하며 이건 선배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할테니 걱정말라는 제스추어까지 취할 수 있었고, 그래도 어쨌든 일이 잘 되게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감정적 동조도 일정 부분은 했다. 실리도 챙기고, 일도 되게끔 해놓고 돌아와서 자리에 앉았다.
묘한 쾌감과 뿌듯함이 함께 한다.
'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할 말 못하고 늘 속앓이하던 나였는데... 내가 변했나봐.'
나는 정말이지 시나리오 작가였다. 퇴근 후 조용한 밤에 나는 늘 그때 이 말을 했어야 했다면서 몇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보곤 혼자서 드라마를 찍어보곤 했다. 그 말을 했더라면 상대방은 이런 얼굴을 했을텐데, 그럼 난 이런 마음이었을텐데 따위를 생각하며 분노와 후회와 체념과 좌절 사이를 오가곤 했다. 나는 늘 그렇게 억울한 캐릭터였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할 말을 모두 했다.
억지 쓰는 사람에게, 그건 당신의 불찰이었다고, 하지만 내가 기꺼이 검토해보겠다고 나의 입장을 명확히 이야기했고 조금의 후회도 없이 일을 마무리했다.
물론 어디가서 큰소리 치고 돌아온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 싶겠지만 이건 내 인생에선 꽤 역사적인 사건이다. 더이상 어디에서도 억울하지 말기, 망쳐도 좋으니 소신껏 행동하기, 하고 싶은 말 하면서 대범하게 살아가기. 그런 나와의 약속을 처음으로 지켜낸 날이기 때문이다.
어떤 때엔 나도 비굴해지거나, 혼돈에 빠지거나, 아리송해질 수도 있다. 과연 무엇이 맞는 길인지 잘 모를 수도, 확신이 줄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내 영역을 지켜나가고, 상대방의 무례함과 안하무인의 태도에도 더이상 약자처럼,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나약함을 두르고 살지 않을 것이다. 직장생활에도 갑옷이 있을까? 내가 근무하는 이 자리는 전쟁터일까?
눈 아래에 사람이 없다는 듯 목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가 작지만 내면이 단단한 사람도 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앞으로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커진다고 해서 나도 같이 키우진 말자. 나는 오히려 속도를 내 편으로 가지고 와서 다급하고 언성이 높아지는 사람에게 휘말리지 말고, 오히려 더 느리게 침착하게 내 할말을 최소한으로 해보자.
첫 번째 공격과 반항의 역사를 썼다. 오늘 함께 티타임을 가진 젊은 직원 두 사람에게 여전히 나도 직장생활에서의 좋은 길을 찾는 중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나이는 먹었어도, 여전히 누울 자리, 발 뻗을 자리, 소리 내지를 자리가 명확하지 않은 그 길 위에서 어떤 날은 마음껏 질러도 보고, 어떤 날은 말 대신 행동으로 나를 쉽게 무시할 사람으로 보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
나는 그렇게 또 허들 하나를 넘었다. 과거엔 너무 높은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신경쓰지 않는 낮은 허들 하나를. 내가 언성을 높이고 있을 때, 하고 싶은 말을 따박따박 흔들림없이 하고 있을 때, 막상 아무도 나를 흉보지 않았고 제 할 일을 하느라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토록 남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걱정하며 살았는데, 내가 매번 깨달아가는 것은 '남들이야말로 정말로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나는 더욱 내 하고 싶은 것에 열중하고 싶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말, 만나고 싶은 사람, 가보고 싶은 장소를 탐닉하며 나는 그렇게 눈 안에 좋은 것을 담고 마음에 행복한 것만 품으며 살아가고 싶다. 시원하게 지르고 온 나의 목소리, 나의 주장이 어디선가 독백으로 날아다니는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작은 마음에도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힘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 밤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