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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렛 Dec 30. 2022

마침내 한 걸음 더 나아간 대화

24시간 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구나. 누군가에겐 평범할 하루가 나에겐 특별하고 조금 힘에 부쳤다. 어젯밤 남편과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했다.


"여보, 회사 제일 꼭대기층에 올라가면 거기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나 그만큼 힘들어."


이 말을 시작으로 그동안 수시로 감정이 격해져서 제대로 나누지 못한 대화를 어제는 좀 진득하게 나눌 수 있었다. 말 하는 중간에 울음이 날 것 같은 순간도 있었고 대화를 중단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기도 했다. 그 역시 감정이 들쑥날쑥했지만 결국은 대화를 이어갔다. 몇 개월 전보다는 조금 더 진전된 대화를.


"여보, 나 힘들어." 라고 하면,

"다들 힘들어." 라고 답하던 그도 변했고,

툭 하면 눈물부터 흘리고 대화가 어려우니 아예 속앓이를 선택하던 나도 변했다.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얼마만큼 힘든지를 이야기했다.


당신이 보기엔 우스운 책, 시시한 책일지 몰라도 나한텐 글 쓰는 게 그렇게 중요하고 행복한 일이야. 그리고 자기계발서를 한 권, 에세이를 한 권 써보니 이젠 운명처럼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지난번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소설 아카데미에 등록한 것이었어. 그만큼 나한텐 진지하고 죽고 사는 문제야.


나도 글 쓰는 것에 있어서 떳떳하고 싶어서, 가정 경제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딱 몇 년간 눈 딱 감고 직장생활 하는 건데 그게 죽기만큼 힘들다. 매일 매일이 고통스러워. 매 순간, 매 시간이 따갑고 아파.


"좋아, 그렇다면 당신의 진정성을 보여줘. 내가 당신의 성실함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당신이 글을 쓰고 싶다는 그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 보여줘."


이렇게 둘의 대화는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다. 그렇게 밤이 내려왔다.




한 걸음 더 진전된 대화. 회사를 못 다니겠다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던 그에게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둘이 벌어 알뜰하게 살아야 굴러갈 가정 경제에 바퀴 하나가 빠지게 생겼으니 그로서도 답답할 노릇일 터다.


아침에 출근해보니 회사는 난리통이었다. 승진과 인사이동 발표가 나서 회사는 뒤집어져있었다. 하루종일 인사를 하러 다니던 승진자들의 모습, 새해 인사를 하는 사람들, 축하와 격려를 주고 받는 사람들 속에서 웃으며 인사를 했고, 멀쩡한 한 명의 직원으로 보이기 위해 사교적인 미소를 장착했다. 온종일 웃으며 사람들과 부대꼈다. 최대한 좌절하지 않은 척, 최대한 아무렇지도 우울한 적도 한 번 없었던 것처럼, 하루종일 가면을 쓰고 살았다.


이렇게 회사에서 온 힘을 다 빼고 온 날, 아이 둘은 유독 달라붙는다. 유독 말을 듣지 않는다. 친절했다가 화를 냈다가,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혼을 내서 아이들을 재우곤 방에 돌아와서 괴롭고 미안한 마음을 어디에다가도 두지 못한다. 미치겠다.


세상 어디에다가도, 어느 시간에도 진짜 내 모습을 보일 수가 없다. 늘 어떤 척을 하고 살아가는 내가 너무나 가엾다. 유능한 척 하는 것도 이젠 불가능하고, 밝은 척 하는 것도 힘에 부친다. 씩씩한 척이나 기분 좋은 척도 역시나 어렵다. 갈수록 어떤 척을 하며 살던 모든 밑천이 바닥난다. 그러니 이젠 어떤 척도 하지 않고 산다. 어두운 얼굴도, 기운 빠진 내 몸도, 가죽같이 껍데기만 남은 내 표정도 숨기지 않는다.




내 힘듦이 아이들에게 전염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데,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날 아이는 유독 말을 듣지 않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만 간다. 차의 시동을 켜서 출발해야 할 시간인데도 아이는 늦장을 부린다. 너무 화가 나서 미적거리는 아이에게 걸어서 학교에 가라고 말하고는 차로 왔다. 둘째만 태워서 출발하려다가 마음을 바꿔서 기다린다. 헐레벌떡 뒤늦게 뛰어나오는 첫 아이를 이렇게 부른다. "야!"


그렇게 아이를 "야!"라고 부르는 것이 좋지 않다고 육아서에서 봤지만 이미 내 마음은 불길에 휩싸여있다. 늦어서 발을 동동 굴러도 아이는 내 급한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내가 아이를 험하게 부르는 그 소리를 이른 아침 생수 배달하는 아저씨가 들었다. 아이는 자존심이 상했고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엄마가 나한테 소리 질러서 택배 아저씨가 쳐다봤잖아."


아이에게 사과를 하고 차를 몰아 출발한다. 연거푸 사과해봤자 마음은 무너진다. 그깟 출근 시간이 뭐라고 지각 조금 하는 게 뭐 어때서 사랑하는 아이에게 막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저녁 외식을 하고 바로 옆에 위치한 다이소에 들러서도 아이의 마음이 상하지 않길 바라며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 집에 돌아와서 재워달라고 징징거리는 아이를 보며 또 다시 폭발하는 내 모습, 아침부터 밤까지 제대로 된 내 얼굴 한 번 가져보지 못하고 연신 타인의 감정이 상하지 않기를, 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애쓰며 살아왔는데 정작 내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이 하루가 너무 길고 아팠다.


생각해보니 이건 오늘 하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올 한 해가 내게 그랬다. 하반기에 회사에 복직하고부터는 하루도, 단 하루도 편안하고 행복하고 기분좋은 날이 없었다. 매일 죽지 못해 사는 마음,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가야 하는 마음, 내 옷이 아닌 것을 입고 있는 마음으로 버텨왔다. 나와 만나는 사람들,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웃는 낯을 가져보려고 노력도 해보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이내 어두운 얼굴이 되어 참아왔던 화가 가장 힘이 약한 아이들에게 가버린다. 그 무서운 길이 자꾸 뚜렷해진다. 멈추고 싶다.




어떤 가시밭길도 끝은 있다. 세상 전체가 가시밭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어떤 장소, 특정한 지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어떤 시간을 통과해야만 그 이후의 삶이 훨씬 양질로 바뀌는 수가 있다. 낮의 나와 밤의 나 사이에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 낮에는 연기를 하고, 밤에는 그 연기를 평가하며 수없이 눈물 짓는다. 그러니 하루가 낮과 밤을 통틀어 온전한 때가 있을리가 없다. 차를 타고 회사로, 집으로 오간다. 그 차를 그대로 몰아 엄마의 자리, 직장인의 자리가 아니라 그냥 나 혼자의 자리로 도망가고 싶다.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아무 상관없는 삶이 있다면, 그런 자리로 가고 싶다.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 자리 말고, 그냥 대충대충 기분 내키는대로 해도 되는 어느 자리로 가고 싶다. 그런 시간으로 이동하고 싶다. 나이가 들고 해가 거듭될수록 편안해지면 좋겠는데 갈수록 모든 것이 불편해진다. 내가 불편한 자리를 찾아들어가서 그런 걸까? 어디가 내가 있을 자리일까? 힘든 자리를 통과해내는 이 시간은 얼마나 이어질까?


지나가는 한 해를 접고 새해를 맞아보지만 마음은 더 움츠러든다. 내가 아닌 것 같은 얼굴, 내가 아닌 것 같은 말을 하며 살아간다. 진짜 내 모습을 열면 모두 도망갈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그런 모습을 보여도 더 나를 깊이 사랑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 시간을 버틴다. 마지막으로 오늘 하루를 짜증으로 마감하는 엄마에게 딸이 편지를 보내왔다. 이 편지와 함께 한 해를 마무리 해야겠다. 그 마감의 시간에 나를 너무 다그치지 말아야지,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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