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이올렛 Jan 14. 2023

더없이 맑은 여행지에서의 그들


똑똑하고 흠잡을 곳 없이 잘난 사람들이 천지인 세상이다. 어딜가도 흐리멍텅한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어수룩한 사람도 없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잘 안 보일만큼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더욱 빈틈있는 사람, 자신의 허술한 부분을 거리낌없이 내보이는 사람에게 마음이 기운다. 그런 사람 옆에서 내 아픔도 열어 보이고 싶다.


현금을 뽑아들고 여행을 떠났다. 그 지역은 카드보다는 현금을 선호한다는 현지의 지인이 알려준 정보를 듣고. 만나는 곳마다 순수하고, 친근한 모습의 현지인을 만났다. 식당 주인, 매표소 직원, 관광해설사 등. 그들은 한결같이 맑았다. 어린 시절을 여행지와 가까운 곳에서 보낸 기억 때문인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방문한 그 지역은 마치 나를 품어주는 것처럼 따뜻했다.


꼬박 4시간이 걸려 집에 도착했다. 잔뜩 흥분한 아이들을 씻기고 먹여 재우고 나니 말할 기운도 없이 지쳤다. 스키 부츠 안에서 찰과상을 입었던 정강이는 며칠간 연고를 바르지 못한채 방치했더니 벌겋게 성이 나있다. 남편이 보더니 항생제를 먹어야 할 정도라고 한다. 아픈 줄도 모르고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읽고 싶었던 책이 있어서 여행 다녀오는 날에 맞추어 인터넷으로 주문을 해두었고, 현관앞에 알맞게 도착해있다. 피곤한 몸이지만 기쁜 맘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공감가는 구절이 나오면 갑자기 눈물을 쏟기도 한다. 마흔살 언저리의 아이 엄마가 쓴 글은 그렇게 내 가슴을 두드린다. 그러면 말릴 새도 없이 눈물이 쏟아져내린다. 서너살쯤 되는 아이가 온몸을 들썩거리면서 울듯이 그렇게 책상에 앉은채로 소리내지 않고 운다. 너무 똑같은 심정이어서,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혹은 남편에게 맡겨놓고 글쓰기를 배우러 다녔다는 작가의 글에 그만 완전히 이입되고 만다.


그리고 집중력이 힘을 다하고 나면 나도 그 책의 작가처럼 무척이나 글이 쓰고 싶어진다. 이 중독현상을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을까? 쓴다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냥 일찍 자고 말지 왜 꾸역꾸역 쓰는 걸까? 계속 글속의 나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만나도 만나도 자꾸 만나고 싶은 그 사람, '나'를 매번 새롭게 발견하고 싶어서 쓴다. 오늘은 내 안의 어떤 면이 발굴될까? 탐사대가 된 기분이다.


오늘 꺼내놓고 싶은 것은 여행지에서 만났던 순수한 눈빛과 숨기지 못하던 순박함이다. 나는 그것이 무척 그리웠다. 잘 짜여진 서비스 매뉴얼에 맞추어서 세계 최고 서비스를 지향하는 곳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정작 내 마음은 매번 쇠에 부딪히는 것처럼 차갑고 날카로워지곤 했다. 아무런 서비스 교육을 받지 않으셨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에 마음 깊이에서부터 편안함과 행복, 감사함을 갖게 되는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가 감히 그들을 순수하고 순박하다고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  안의 알량한 거만함이 나온 것은 아닐까? 실제로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서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도 있다. 런던 시내에서 가장 세련된 것을 보고 왔는데, 아무리 서울에서 제일 좋은 것을 본다한들  그리 특별한  있겠어? 그렇게 내가 거쳐온 어떤 길을 유난히 높은 것으로 보고,  외의 다른 길은 하찮은 것으로 보던 고고한 마음은 삶의 여러풍파를 만나며 저절로 고개 숙여졌다.


그러니 어느 지역에서 누구를 만나 그들이 착했다, 친절했다라고 평가하는 것 역시 어쩌면 수도권에서 고객응대 매뉴얼에 맞춰 받던 틀에 박힌 서비스를 기준으로 삼으며 그것과 사뭇 다른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들의 소탈한 모습을 한 번 평가해보겠다는듯 작정한 모양새가 아닐까 싶어 부끄러워진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주 여행을 갈 수는 없지만 내가 나에게 여행지가 되어줄 수 있지는 않을까? 내 유일한 사치인 '새 책 사기'를 하면서 매번 새로운 작가의 목소리를 빳빳한 책장 사이에서 만나고 마음껏 줄치고 메모하면서 작가와의 상상속 만남을 가지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느껴지는 마음속 진동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내 생각을 적어보려고 한다. 그렇게 어떤 것에선 감동을, 어떤 것에선 부끄러움과 깨달음을 얻어가며 매번 조금씩 평화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마음이 편안하고, 품는 생각이 편안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다행히 이번 여행에서 내 눈과 마음에 그런 모습을 많이 담아왔다. 더없이 맑은 눈을 가졌던 그들이 내 마음에 담겨 있다면 나도 그런 눈빛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빈틈, 허물, 나약함이 어쩌면 눈빛을 나누어 주는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러니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험난했던 날들 또한 나를 만드는 소중한 재료들이었으리라. 오늘은 그런 생각으로 이 지친 몸을 잠자리에 눕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키장, 그 아늑한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