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보 인사 시즌, 차갑고 딱딱한 음식을 먹고 뱃속이 얹힌 느낌으로 출근과 퇴근을 반복해왔다. 희망한 부서에 배치될까? 과연 그런 행운이 올까? 가슴을 졸였고 숨을 몰아쉬며 긴장했다. 결과가 나왔다. 큰 공간에서 백 명 넘게 사무 근로자에게 주는 최소한의 면적을 받아 생활하다가, 마침내 인구밀도가 낮은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기분이 덤덤하고 감사하다.
오늘은 이전 부서에서 근무하는 마지막 날, 사실 얼굴에 웃음꽃이 자꾸 피어서 표정관리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동안 이 부서에서 많이 힘들었다고 나를 다독이며 새로운 부서로의 이동을 준비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두 아이의 서로 다른 반찬 취향을 맞춰가며 돈가스를 튀기고, 한 명에게는 미역과 초고추장 반찬을, 또 한 명에게는 계란을 휘저어 가벼운 스크럼블을 만들어 넣어주었다. 한 명에게는 배추 김치만, 또 한 명에게는 배추 김치와 고들빼기 김치를 함께 넣어주었다. 친구들은 어떤 반찬과 간식을 가져오는지 쏟아내는 아이들의 주문을 기억했다가 부지런히 인터넷으로 장도 본다.
눈이 많이 온 아침이다. 밤새 온 것으로는 부족했던지 출근길에도 눈은 그칠 줄을 몰랐다. 아이 둘의 발에 부츠를 신기고, 배드민턴 수업 받는 날이라 운동화까지 손에 들려 교문 앞에 내려주고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하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간 지 모르겠다. 오전 내내 버릴 것은 버리고 짐을 쌌다. 업무 인수인계도 하고, 컴퓨터의 비밀번호도 초기화시켰다.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어서 업무도 정돈해두었고 꼭 인사 나누어야 할 사람들에게 편지, 문자, 전화로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중간중간 다른 부서로 가냐고 아는 체를 하는 사람들과도 티타임을 가졌다.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를 탈탈 털어 쓴 날이다.
남에게 부탁하는 것이 늘 쉽지 않다. 그래서 최대한 물건을 많이 버리고, 커다란 종이 가방에 차곡차곡 짐을 담아 차에다 실어 날랐다. 내일 출근하며 새로운 팀으로 향하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하루가 너무 무거웠어서 쓸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몇 글자를 적어보니 생각보다 단촐하다. 그만큼 한 일에 비해 마음이 많이 무거웠었나보다. 부담스럽고 불편했었나보다. 사람들과 잘 이별하고 이동해서는 정다운 첫인상을 남기는 것이 참 중요하다 싶다. 그때 섭섭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고, 반대로 찡하고 고마운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그걸 알면서도 막상 인사를 할 땐 입이 잘 안 떨어지기도 하고 그동안 애써 눌러놨던 속상했던 마음이 튕겨 올라오기도 한다. 오늘 몇몇과 대화를 나누며 내 안의 여러 감정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피곤할 수 밖엔.
비상 식량으로 사두었던 냉동피자를 데워서 아이들에게 주고 역시나 냉동실에 비상용 간식으로 사둔 붕어빵을 몇 마리 구워서 아이들과 나눠먹었다. 그리곤 설거지를 못 하고 한참을 누워 있었다. 그야말로 몸져 누워있었다. 보일러를 따뜻하게 맞춰놓고 엄마는 피곤해서 잠시 누워있을테니 너희들끼리 잘 준비하고 누우라고 했다. 한동안 불을 끄고 잘 분위기를 내는가 했더니 웬 걸! 딸이 안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돌봄교실에서 자기를 놀리는 언니가 있어서 억울한 마음에 도저히 잠을 이루기 어려운가보다.
바보 : 바다의 보라팬티
자꾸만 내 딸에게 바보라고, 바다의 보라팬티라고 놀린다는 한 학년 위의 그 아이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속상했다. 나도 초등학교 1학년생이 된 기분으로 속이 끓었다. 유치원 때까진 불편한 상황이 있으면 알림장 어플에다가 선생님께 친구와의 관계를 주의깊게 봐주시길 부탁드린다는 말을 남겼지만 초등학생이 되고부터는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했으면 해서 최대한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딸은 등교하기 전에 방문을 닫고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그 언니가 오늘은 자길 놀리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비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충격이었고 더욱 속상했다.
딸의 마음을 많이 헤아려주고 싶었다. 속상했겠다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냐고 해주곤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보았다. 같이 장난으로 맞받아친다, 선생님께 이른다, 안 들리는 것처럼 놀린다... 몇 가지 시나리오를 이야기해봤지만 딸은 계속 마음을 졸이며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하고, 딸이 나의 대사를 따라하게끔 연습도 하고, 여러가지 장난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긴장을 풀고 딸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잘 전달될 수 있게끔 연습해봤다.
내일 학교 가서 이야기 할 수 있겠냐니까 못하겠단다. 주로 목요일 보드게임 시간에 둘이 마주 앉았을 때 많이 놀린다고 한다. 딸이 커다란 눈에 속상한 마음을 가득 안고 대꾸 한 마디 못하고 한 학년 위의 그 아이에게 당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속이 쓰리다. 그래서 다음주까지 매일밤 나와 연습하기로 했다.
"그렇게 놀리는 언니가 보라팬티 입었다는 거지? 선생님 00 언니가 저 자꾸 놀려요."
간단한 몇 마디 문장을 입밖으로 내뱉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딸을 보며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회사생활을 하며 제때에 내 감정을 시원하게 말 못하고, 상대방 기분을 우선으로 두며 내 의견을 내세우는 건 꾹 참는 편인 나 말이다. 딸은 그 언니랑 자기랑 둘만 있을 때는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 다른 학생들이나 선생님이 계실 때는 전부 자기만 쳐다볼 것 같아서 말을 못 할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도 회사생활이 힘든 이유 중에 아주 큰 부분이 바로 사람이 주변에 너무 많아서 불편하다는 것인데. 혹시 내가 그런 면을 물려준 건 아닐까 싶어서 마음이 더욱 저려왔다.
딸은 언젠가 타인의 놀림에 응당 자기 목소리를 내며 반박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돕고 또 도울거니까 가능할 것이다. 그럼 나는? 나도 내일부터 새로운 부서로 출근하며 그렇게 살려고 한다. 물러터진 홍시같은 사람 말고, 까칠하게 톡 쏘아붙일 줄도 아는 고슴도치 같은 면도 가진 사람으로 살 것이다. 나는 못 한다, 상대방 기분 상할까봐, 전체의 분위기를 망쳐버릴까봐, 같은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아야지. 버텨야 한다, 힘들다, 못하겠다, 같은 암울한 상황이 되지 않으려면 나도 직장인으로 사는 한, 두 아이를 책임지고 키워내야 하는 엄마로 사는 한, 그런 면이 필요하다. 내 목소리를 당당히 내며 사는 면.
딸아, 너는 보라팬티를 들먹이며 한 살 어린 동생을 놀려대는 언니에게 호통을 치렴.
엄마는 안하무인으로 남을 괴롭히거나 자기 입장만 내세우는 무례한 사람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할 줄 아는 사람이 될게.
우리 그렇게 한 발자국씩 걸어나가보자.
엄마의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민더 덕분에 엄마는 엄마 자신에 대해 새로운 면, 다양한 면을 매 순간 발견한다.
숨겨져 있던 면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더욱 멋져지네.
모두 네 덕분이야. 고맙다. 사랑한다.
우리 민더는 엄마의 보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