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나는 매주 이 시간이 되면 다리에 힘이 다 풀리곤 한다. 모든 에너지를 다 털어쓰고 겨우 책상에 앉아 일주일간 달려온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갖는다. 부서 이동 후 일주일이 흘렀다. 옮긴 사무실에 적응해야 했고 새로운 부서원들과 호흡을 맞추느라 여기저기에서 연신 "잘 부탁드립니다."를 외치고 다녔다. 상대방의 첫인상이 내 머릿속에 남듯, 나도 여럿의 마음에 첫인상을 남겼으리라.
적응에 힘을 쏟고 있는데 사내 메신저로 이전 부서 직원들이 연이어 안부를 물어왔다. 새로운 부서는 괜찮은지, 잘 적응하고 있는지 먼저 물어오는 그 마음이 너무 예쁘고 고마웠다. 나도 그렇게 먼저 살갑게 묻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실은 직장생활 자체가 나는 모든 에너지를 쏟는 일이라 정말로 기운을 모아가며, 무리하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출근 준비 - 출근 - 오전 근무 - 점심시간 - 오후 근무 - 퇴근 - 퇴근 후 아이들 돌보기까지... 나는 이 풀코스 마라톤 같은 일과를 매일 반복중이다. 여기에서 한 단계라도 망치지 않으려면 잠을 잘 자야하고, 감정도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바짝 긴장한 상태로 금요일까지를 보내고 나면 기운이 쪽 빠지는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선배님 두 분, 후배 한 명은 메신저로, 휴직중인 후배는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잘 적응하고 만나서 밥을 먹자는 이야기. 내가 가장 기다리는 말이지만, 약속을 띄엄띄엄 잡아서 에너지 관리를 잘 해가면서 만나야 한다. 자칫 무리하게 연달아 만나기로 했다간 몸이 지쳐서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버리게 된다.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
점심엔 이름에 똑같은 글자가 들어간 후배들과 밥을 먹었다. 회사에서 예뻐하고 아끼는 후배들인데 밥을 먹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그녀들을 우리집에 초대해서 함께 밥 먹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왜 내 기억엔 없지? 나는 연년생 둘을 출산하고 나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이십 대까지는 야망이 넘치던 사람이었는데, 삼십 대의 10년 세월은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방구석에서 울고 있었거나, 아이를 앞뒤로 안거나 엎고 있었고, 아니면 주방에 서서 종종 거리며 서빙을 하고 있었다. 손이 부르트도록 손빨래를 했고, 요리에 취미가 없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많은 요리를 했으며, 아픈 허리를 문질러가며 아이들과 함께 누워 재우곤 했다. 그처럼 온몸을 바쳐 아이 둘을 키워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꽤 많은 부분 기억을 잃었다. 기억을 잃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자세히 기억했다간 너무 서글퍼질지도 모르니까.
함께 밥을 먹은 후배가 이런 말을 했다. 인턴 근무를 할 때 내가 그녀에게 우리 부서에서 근무하는 마지막날, 팀원들 한 명 한 명에게 편지 쓰는 걸 권유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눈이 띵그렇게 커졌다. '아니, 내가? 그런 오지랖을 부렸단 말이야?' 지금은 기억도 못하는 나의 그 말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팀원 모두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 예쁜 마음을 내가 받고 싶었었나보다. 나의 그 말을 그녀가 다행히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또 한 명의 후배는 지금 해외 유학을 준비한다고 한다. 내가 십년 전에 유학가겠다고 영어 학원에 다니고, 밤에 남아서 공부하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과정을 보냈던 나를 보고 대단하다고 했지만 나는 아이를 낳은 후 손에 든 많은 것을 잃은 기분이 들었었다. 꿈은 있되 현실은 그럴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았으니 말이다. 가끔은 이렇게 말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세상 최고로 행복하다는 말만 해야 옳을 듯 한데, 그 반대편의 말, 이를테면 출산 후 기억을 잃었다거나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되었다라는 말은 옳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엄마'란 어때야 할까?
마땅히 정해진 것이 있을까?
금요일 저녁엔 유난히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지금 잘 살고 있는거 맞나? 내가 직장에 다니느라 가정에 소홀한 만큼 아이들이 충분한 보살핌을 못 받아 멋지게 성장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을 사서 하다보면, 이 또한 다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란 생각이 든다. 엄마, 아빠, 양쪽이 일하는 우리집의 상황, 그럼에도 우리 부부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을 주면서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중이다.
지난 10년은 통틀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굵직굵직한 것만 기억하며, 했던 일의 대부분을 잊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더욱 글을 쓴다. 지금이라도 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계속 써댄다. 글쓰기는 꼭 나의 의식을 붙잡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고 데이트 신청하는 일 같다. 오늘은 후배들이 끄집어 올려준 몇년 전 추억을 앞세워 과거로 잠시 다녀왔다. 나는 앞으로도 더욱 기억력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남의 입에서 나오는 낯 부끄러운 에피소드가 생겨나지 않게,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을지라도 마음을 따뜻하게 먹으며 포근한 사람으로 살아가고싶다. 내가 하고 다닌 말, 하고 다닌 행동이 결국 훗날의 나를 이룰테니.
에너지 레벨 제로에 가까운 금요일 저녁. 급속 충전(꿀잠)을 위해 몇 가지 수면 용품을 애용해야겠다. 말랑말랑한 소음방지용 귀마개, 배에는 전자렌지에 데운 따뜻한 팥주머니를, 최근에 발견한 나의 최애 아이템 온열 수면안대까지 장착하고 꿈나라로 들어가야지. 수고했다. 긴 휴직 - 복직 후 첫 부서에서 6개월 - 새로운 부서에서 1주일. 나의 미래는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우선 오늘은 행복하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꺼내서 쓸 수 있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정말 다행이다.
오늘 미소 지을 수 있는 건,
보상을 바라지 않고 과거에 했던 나의 말과 행동들,
그리고 그것을 좋은 기억으로 품고 있다가 다시 나에게 돌려준 주변인들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