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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렛 Feb 22. 2023

돈과 소설

와! 내가 변했다. 식욕이 엄청나게 당기고 특히나 단것이 자꾸 생각난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각종 건강보조식품을 거의 흡입하듯 마시고 털어넣는 것은 물론 비타민, 칼슘 등 각종 영양제도 야무지게 먹는다. 간식은 또 얼마나 알차게 먹는지. 거의 하루종일 무언가를 먹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일도 하고 있다. 나는 직장인이니까.


왜 하루종일 뭘 먹는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그만큼 사무실 업무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스트레스를 받는 업무라기 보다는 긴급성을 요하는 업무라서 그때그때 속도감 있게, 기분좋은 긴장감을 서핑하듯 타면서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성격의 부서는 처음이라 최대한 기분좋게 해나가려고 한다. 아무래도 요즘 살 찌기 직전의 입맛처럼 먹성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안한 시즌이 온듯하다. 이건 확실히 길조다.


그동안의 흉조를 힘겹게 이겨내고 나서일까? 극명하게 바뀐 이전 부서와 새로운 부서 사이의 대비효과 때문일까? 나의 일상은 편안함과 만족감, 행복감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래! 이맛에 직장 다니지,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잘 살고 있다.


최근 몇 년은 돈생각 없이 지냈다. 지인은 물론 가족까지 부동산으로 돈을 벌어도 멀뚱멀뚱 바라보며 크게 부러워하지도 않고 살던 나였다. 전국민이 코주부, 코인 주식 부동산 중 한 가지는 꼭 하던 그 시기를 나는 독야청청, 자본주의의 이단아로 잘 살아왔다. 물건을 살 때 가격을 보지 않았고(게으름), 별도의 투자를 하지 않았으며(다른 곳에 정신 팔림), 우리집 자산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채(무지) 살아왔다.


3년간의 휴직은, 회사에서 멀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속세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난 인간으로 살았다. 그때의 나에게 누가 돈을 준다고 했더라도 나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나의 꿈, 적성 개발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였다. 이제는 그때를 과거로 규정할 만큼, 마치 긴 강을 건넌 것처럼 아련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겨우 6개월이 흘렀을 뿐이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꽤 달라졌기 때문이다.


요즘은 돈이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저수지 통장에 방치되어있던 돈을 쪼개서 금융상품에 가입했고 학군지에 관심이 생겨서 드디어 이사계획을 짰다. 은행에 내 발로 찾아가서 상담을 받기도 하고, 재무상담을 받고자 나만의 플랜을 짜보기도 한다. 돈과 삶, 꿈은 함께 가는 거라는 생각도 드디어 가지게 되었다. 희소식이다.




소설 수업은 두 번 들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극소수의 늙은이로 참여하려니 영 겸언쩍고 정작 내가 써내는 글도 후질것 같아서 이미 아카데미 건물의 1층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주눅이 들었다. 내가 제일 못하면 어쩌지? 나만 이해 못했나봐, 같은 생각을 하면서 수업에 참여했고 기껏 꿈이라고 설정해둔 '소설가'가 너무 막연하고 얼토당토 안 한 단어인가 싶어서 시무룩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중, 다음주 수업 전에 미리 읽고 가야 할 소설을 읽다가 그만 깊은 감동을 느껴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이런 글, 이렇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글, 이런걸 써보고 싶은데 이게 어려우면 그 비슷한 언저리의 글이라도 쓰려고 했던 나의 초심이 떠올랐다. 그래, 내게도 단단한 초심이 있었지!


선생님께서 올려주신 글은 치매 할아버지를 모셨던 가족의 이야기였다. 주제가 치매인줄도 모르고 읽기 시작하다가 그집에서 일어난 일을 무심히 따라가다가 그만 가슴이 먹먹해서 마음속에 태풍이 일었다. 작가는 간병 경험이 있었을 것 같다. 그 경험은 해본 사람만이 쓸 수 있을것이기에.


작가의 야무진 글맛에 취해있다가 내가 처음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마음 먹었던 계기가 떠올랐다. 치매 시어머니를 모시던 내 마음을 에세이로 써보니 글을 쓸 때와 써놓은 글을 읽을 때, 출간할 때 각각 의미있고 감사했지만, 가장 민감한 가족 이야기를 나는 모르는 불특정 다수가 훤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영 개운치가 않았다. 아무래도 포장하게 되고, 솔직하지 못하게 되며, 최대한 긍정적으로 마무리해야 된다는 주문 같은 것에 걸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글의 장르가 에세이가 아닌 소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등장인물의 이름, 상황, 사건, 전개를 모두 각색할 수 있다. 글의 내용이 모두 허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쓰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가슴에 응어리가 되어 남아있는 것을 반드시 글로 풀어내야 하는데 그렇다고 사실관계에 사로잡혀 한번 더 고통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소설쓰는 기술이 내겐 필요했던 것이다.


핫한 작가들의 베스트셀러를 찾아 읽고, 그들의 젊음이 가득한 인터뷰 영상 혹은 신문기사를 검색하면서 이렇게 주류 작가세계와는 가까워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등단하기에도 나이 지긋하고, 한창 작품활동을 하기에도 나이가 많은, 나같은 사람이 쓰는 글이 과연 읽힐까 자꾸 좌절하게 되었다, 한 편을 제대로 써보기도 전에.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굴을 파서 좌절하지 않을 이유가 생겼다. 지금까지 내가 겪은 많은 일들이 모두 글감이 될 수 있겠다는 희망적인 사실이 자꾸만 나를 일으켜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이렇게 직장생활 하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경제적으로 토대를 만들고, 맞벌이 가정에게 국가가 주는 혜택을 받으며 아이들을 키워놓고, 더이상 내 손길이 필요치 않을때 나는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 '등단'이라는 하나의 통로를 거치고자 얼마나 많은 습작생들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을까 생각하니 어떤때엔 만나본 적 없는 그들의 어깨를 한번씩 토닥여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돈에 대한 관심도 생기고, 집 나갔던 먹성도 돌아오고, 첫번째 습작 소설을 써볼 기회도 생기고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새로운 부서에서의 삶에 기쁜 마음으로 숨쉬고 있고 주말엔 소설수업의 공기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몇 개월간 완전히 잃어버렸었던 웃는 법도 이젠 꽉 붙들어두었고, 눈에 들어오지 않던 책도 이젠 야무지게 꼭꼭 씹어가며 달게 읽는다.


꽉 막힌 도로같던 내 마음도 시원한 통행을 만들어낸다. 상행, 하행의 생각들이 원활히 움직이는 중이다. 아이들은 키가 크고 살이 오르며 점점 작은 글씨의 두꺼운 책으로도 스스로 영역을 넓혀나간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밤마다 읽어주던 책을 이젠 아이들이 한쪽씩 돌아가며 읽는 것으로 룰이 바뀌었다. 나는 칭찬해주고 책장만 넘겨주면 자기들이 맛깔나게 읽는다. 물론 좋은 면만 적어서 그렇지, 남매간의 다툼도 출근시간의 등교 전쟁도 못지않게 활활 타오른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시끌벅적하게 아이도, 엄마도 자라는 중이다.


이젠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몇년 후를. 오늘 하루의 기분도 장담할 수 없었던 시기를 드디어 지나보내고 이젠 가까운 미래와 중간 미래까지도 차츰 그려볼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직장생활을 20년간 하고 공문서를 작성하던 딱딱한 문체를 과연 벗을 수 있을까 우려되지만, 어쩌면 그 또한 나만의 스타일이 될 수도 있으니 기분좋게 좋은 작품들을 읽고, 또한 기분좋게 내 생각의 흐름을 계속 적어보려고 한다.


읽는 책이 달고, 쓰는 행위가 기쁘다.

그때가 가장 살아있다는 느낌이고,

마침내 더 좋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의지로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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