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소설쓰기 교실에 간지도 4주가 지났다. 한 달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다니. 첫 주는 소설쓰기의 이론에 대해 배웠고, 둘째 주부터는 단편소설 두 편씩을 함께 리뷰해보았다. 거기에서 배울 점을 찾고 내가 소설을 쓴다면 어떻게 적용하고 싶은지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함께 수업 듣는 사람들이 발표하는 면면을 보며 나는 이 교실에서 나이로는 두 번째겠구나 짐작했다. 애 둘 딸린 아줌마가 소설쓰기반에서 꿈을 키운다.
선생님께서 제시해주시는 단편소설은 분야가 아주 다양하다. 몸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산업재해를 당하는 이야기, 외국인 노동자가 지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야기, 평생 거짓말로 살아가는 엄마를 이해하는 딸의 이야기, 백수 여성이 꿈을 찾는 이야기, 가족내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이야기, 노인 학대 이야기, 끔찍한 살인으로 가족의 연을 끊어버린 이야기... 내 취향과는 멀고도 먼 소설들을 숙제로 읽어냈다. 끔찍한 피 이야기, 살인 이야기를 읽으며 아무래도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봐,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도 수업에는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성실히 참여했다.
나처럼 누구에게 조금만 험한 말을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사람이 영화같은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을까? 방에서 조용히 이불 뒤집어쓰고 살아야 마음 상할 일 없을 나 같은 사람도 험한 소설 쓰기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도 꿋꿋이 지하철을 갈아타고 강의실로 향했다.
이제 다음주부터는 학생들이 자신의 습작 소설을 가져와서 그것을 ‘합평’하는 순서로 꾸려나간다. 마음을 훑어내리는 일기 같은 글을 쓰다가 갑자기 창작의 세계로 성큼 넘어가려니 여간 떨리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쓰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하다가 요즘 가장 마음에 떠다니는 생각을 적기 시작했다. 아직은 소설을 쓸 줄 몰라서, 그저 주인공을 ‘나’라고 해놓고 내 이야기를 쓰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간, 어느 날엔 꼭 현실을 뛰어넘어 스토리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거라 믿으며 한 문장, 한 문장씩을 쓴다.
글쓰기가 뭐라고, 내게 무슨 떡을 준다고 이렇게 매달려서 사랑을 구하고 있는 걸까? 글을 쓸 땐 내 주변의 무엇이 어떻게 변하길래. 독자로 살아갈 땐 책 한 권만 내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었다. 그런데 꾸역꾸역 책을 한 권 출간해보니 거기까진 또 어떻게 넘어왔더라도, 그 다음 생각해봐야할 문제는 정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실을 바탕으로 글을 쓰던 에세이 장르에서, 현실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쓰는 소설로 넘어가고 싶었다. 조금 더 과장되게 조금 더 구구절절하게 작중 인물에 집중해서 쓰고 싶었다. 때때로 글 속에 내가 투영될 수도 있겠지만 나쁜 때를 묻히며 사는 면은 조금은 못본채 하고 싶기도 했다. 먹고 살아야하기에 나는 때때로 구렁이 담넘듯 현실과 타협한다.
이제 겨우 습작 소설 두 페이지를 쓴 햇병아리가 소설에 대해서 참 할 말은 많다. 생각은 많이 해봤기 때문에 그 고민의 넓고 깊은 부분에 대해선 얼마든지 떠들어댈 수 있다. 다만 소설가는 작품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기에 나는 이제부터 살아가며 나를 얼만큼 드러내야 할지를 새롭게 설정해야 할 것이다.
마침 핸드폰 통신사를 바꿨더니 기존 연락처의 전화번호가 한순간에 날아가버렸다. 아, 어디로 갔니? 남들이 통신사를 바꾸며 이런 일을 겪을 땐 강 건너 불구경하듯 안 됐다고 생각하고 지나쳤는데 막상 내가 이런 일을 겪으니 마음이 허하다. 꼭 남기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어떻게 한 명 한 명 번호를 묻고 저장해야 할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그 작업은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해보려고 한다. 나는 계속 먼 곳의 빛처럼 내가 살아있다는 걸 글로 써서 증명하고 살테니 서두르지 않아야지.
새학년에 들어선 남매가 폭풍 성장을 하고 있다. 무슨 씨름 선수처럼 밥을 먹는다. 나의 요리 실력이 기우뚱한 덕분에 아이들은 주방에 와서 나를 많이 돕는다. 이젠 나 대신 불 앞에 서서 국자를 휘휘 저을 줄도 알고 냄비가 끓어 넘치기 전에 나에게 미리 ‘엄마!‘를 외치는 타이밍도 잘 잡는다. 김칫국물과 반찬 몇가지만 있어도 ’볶음 시대‘라는 이름을 붙여서 비빔밥을 만들어먹고 미역국 한 가지만 해주어도 두 그릇씩을 뚝딱 해치운다. 아이들이 먹고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나의 성장도 혹시 그들과 맞닿아 있는건 아닐까 기대해본다.
아이들이 잘 때 살며시 남매의 방으로 들어가보면 나는 그들의 커다란 숨소리와 따뜻한 방안 공기에 몸이 녹고 마음이 노곤해진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핑 돈다.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나를 엄마라고 부르며 자신들의 세계를 내게 의지해서 키워가고 있다. 내가 회사와 나를 최대한 분리하며 개인의 꿈을 지키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시즌이라는 걸 아이들은 모르지만 언젠간 내 글의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것을 모아서 보곤 그들의 성장과정이 내가 꿈을 찾는 과정과 정확히 겹쳐있었다는 걸 발견하고 놀랄지 덤덤해할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저 매일 딱 하루씩만큼 충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점심시간엔 운동을 하고 회사식당에서 밥을 먹고, 업무시간엔 정직하고 친절한 직원이 되려고 노력하고, 나머지 시간엔 최대한 나를 잃지 않으려고 한다. 다행히 요즘은 몸이 살 찌는 계절이다. 언제 그랬냐는듯 마음 편히, 웃으며, 살이 조금은 붙어가며, 평온한 날을 보내는 요즘이다.
나의 소설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향하게 될까? 꼭 쓰고 넘어가야 할 주제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한다. 나에게도 그런 주제가 있다. 진하게 쓰고 넘어가지 않으면 평생 호두 씨앗이 목에 걸린듯 켁켁 거리며 살 지도 모른다. 그렇게 써야만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주제가 있다는걸 인정하고, 나는 깊게 그 세계로 한 발자국씩 담궈본다. 옷이 젖고, 몸이 젖어갈테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이게 내 길이고, 가고 싶은 방향이니까.
회사생활을 했던 시간보다 어느 전환점을 기준으로 글을 쓰며 살아갈 시간이 더 길 것이다. 내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이고 나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이 될 것이다. 글을 쓰며 매순간 시간을 바라보고, 나를 관찰하며, 작은 그림들을 이어붙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커다란 그림이 완성되는 날, 이걸 그리려고 그토록 둥글고 커다란 삶을 살아왔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업무 시간이 시작될 때 나의 눈빛과 글쓰기를 시작할 때 나의 눈빛은 다르다. 목소리와 몸의 자세까지도 그렇다. 내가 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은 무엇일까? 그 답을 잊지 않으며 하루를 접고 하루를 펼쳐보자. 소설가 지망생의 하루는 그래서 두 개의 서로 다른 빛으로 이루어져있다. 두 번째 빛도 이제 끄고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