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를 움츠러들게 하는가
10월부터 증상이 시작되었다. 곧 승진할 것 같은 느낌, 분위기, 주변의 관심과 응원. 최우수 성과 직원으로 추천해야겠다며 했던 일을 요약해서 적으라는 말에는 며칠간 구름 위를 걷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 올해 이만하면 최선을 다했지, 맞아, 최우수 성과 직원에 어울리는 것 같아. 뽑히지도 않았으면서 겨우 작은 단위조직에서 추천만 받은 것으로도 이미 확정이라도 된 것같이 얼굴이 붉어지고 표정관리가 필요했다. 그 증상은 11월을 거쳐, 12월이 되자 중증에 다다랐다. 미용실 갈 때가 되었는데 혹시 머리를 자르면 운이 나빠질까봐 미용실마저 가지 않았다. 손톱은 어떻게 자른 걸까? 작은 것 하나도 말조심, 행동조심하며 초겨울을 보냈다.
12월 31일 오후 2시경. 승진심사 뚜껑이 활짝 열렸다. 승진자 명단에 이름이 없다. 승진자 명단에 자기 이름이 있는지 찾고 있으면 이미 떨어진 거라는 글을 어디선가 보았는데, 내가 그러고 있었다. 한 명 한 명 눈을 비비며 살펴보아도 내 이름 석자는 없었다. 하아, 1년 더, 아니 몇 년을 더 이렇게 애써야 하는 걸까. 눈앞이 캄캄했다. 옆자리에 승진한 동료는 축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안면근육을 조심히 관리하며 그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나도 모르게 불쑥 눈물이 나와서 상황을 망쳐버리게 될까봐 눈물샘을 꼭 붙들어메고 말을 건넸다. 애썼다.
새해 아침. 오전 내내 이불밖은 너무 위험했다. 강추위탓일까, 얼음 송곳으로 찔린듯 충격받은 마음탓일까, 밥맛도 입맛도 없었다. 1월 1일, 2일, 3일, 4일. 나흘을 멍하니 보냈다. 마지막 남은 체면 한 줌 때문이었는지 눈물은 흐르지 않고, 그저 퉁퉁 부은 우울한 표정을 짓는 것이 유일한 감정표현이었다. 아, 이제 나 어떡하지? 어떻게 또 한 해를 보내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이미 작년에 다 썼는데, 이제는 좀 보상받나 싶었는데...
그 좋아하는 대형서점에 가서 좋아하는 책들 사이를 거닐어도 표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것만 같고, 보잘 것 없는 벌레로 변해버린 것마냥 거울속의 우울한 얼굴을 볼 때마다 놀라기가 바빴다. 점점 땅속으로 꺼져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한 가지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3년전 이맘때, 회사를 관둬야겠다고 사직서를 냈다가 철회하고 죽겠는 마음으로 다시 회사에 다니던 그때 말이다. 업무시간에는 일에 몰두했고, 조용한 점심시간이 되면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 들어가서 소설 작법서를 읽고, 발췌해서, 필사했었다. 그 행동만이 시든 나무같던 나를 살릴 수 있었다. 누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우울한 건 나아지지 않았고, 그저 작가가 되리라는 작은 희망줄 하나를 붙잡고 직장에서 다 죽어가던 나를 그 줄 하나에 친친 감듯 묶어 길어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조명이 꺼져서 어두웠던 오픈형 사무실과 회의실에만 켜져있던 천장 조명, 누군가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가 책을 펴놓고 쓰고 있는 나를 보고 1초만에 나가던 발걸음 같은 것이 생생히 기억난다. 글을 써야 한다, 책을 읽어야 한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것만이 내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꼬박 만 3년동안 소설 아카데미, 동화쓰기 교실에 다니며 글을 써냈으며 혼자서 스케치북 한 권을 채울만큼 펜드로잉에 열중하기도 했다. 대하소설 토지를 읽었고, 매주 남편과 도서관 두 곳에 다니며 배고픈 사람이 손으로 음식을 먹어치우듯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살고 있다. 그렇게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까지 겨우 겨우 살아나왔다. 그 까만 구렁텅이에서도 살아나왔는데, 이번의 작은 충돌을 이겨내지 못할소냐.
가장 어두운 시간을 더 소상히 써놓고 싶어졌다. 왜냐면 인생은 끊임없이 오르락 내리락 반복할테니까. 다음번 내리막의 가장 낮은 지점에 다다랐을 때, 오늘 이 글을 보며 마음껏 웃고 다시 살아낼 힘을 얻길 바라니까. 그러니 더욱 적나라하게 써두고 싶다. 쓸 수 있는 휴직을 모두 쓰고, 하고 싶은 공부에, 해보고 싶던 출간과 강연까지, 원없이 새로운 세상을 누려봤던 자에게 조직은 말없이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동안 회사에 집중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먼저 보상을 주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나는 다시 낮은 곳에서 새해를 맞이한다. 3년 전 그때처럼. 그래도 지금은 사표를 쓰지도 않았고, 심리상태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온전한 편이다. 끝없이 부닥치고 내팽게쳐지면서도 인생은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다행히 읽고 싶은 책과 쓰고 싶은 글이 여전히 많다는 희망을 안고 새해 첫 달을 품위있게 시작해보려고 한다. 심히 실망하고 좌절하는 내가 신기하다. 회사에서 그토록 이루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반가우며, 그럼에도 회사밖에서 해보고 싶은게 조금 더 많다는 것에 또다른 희망을 느낀다.
양쪽 모두에 손을 뻗어 줄 한 가닥씩을 붙잡고 살아간다. 어느 쪽 줄이 더 팽팽한 지, 내 몸이 어느 쪽으로 끌려가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 두 줄의 매듭을 묶어 한 가닥의 줄을 갖고 살아갈 날이 올까? 둘을 병행하며 살아가는 법을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서 이토록 살이 쓸리듯 쓰라리고 아픈가보다. 직장일도, 직장밖의 꿈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여기 한 명 있다. 그사람도 조직내에서는 승진을 바라고, 조직바깥에서도 이름 석자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이토록 분투 중이라는 사실을, 그자신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슬퍼마라. 반드시 웃는 날, 좋은 날 올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