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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우 Feb 27. 2016

위아래

작문 스터디 #2015년 5월 30일 주제 : 위아래

  한 소년이 우두커니 계단에 서 있다. 그 계단은 소년이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동네의 엉킨 길 한쪽 꽤 경사 진 자리에 오래전부터 자리했었다. 계단은 한 계단마다 다른 높이와 개성의 투박한 돌덩이들이 제멋대로 닳아있는 모양이었는데, 그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계단의 양옆 경사를 따라 낡은 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집들보다 계단은 훨씬 이전부터 자리해서 낡은 집들을 이어가고 있는 터줏대감의 느낌을 풍겼다. 소년은 경사 진 언덕 계단을 따라 늘어진 많은 집 중 꼭대기에 살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소년은 그 계단 한편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홀로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수없이 많이 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었다. 소년에게는 그 계단을 다 올라 집에 다다르는 것은 익숙하고 쉬운 일이었으나, 어쩐 일인지 계단 중턱에서 소년은 한참이나 멈춰 있었다.


  소년은 계단에서 한 걸음조차 '위'로 내디디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꼬마 시절에는 집을 향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단지 '위'를 향하는 방향인 줄로만 알았는데,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집으로 향하는 '위'가 꼭 '아래'로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꼭대기에 자리한 그의 낡은 집은, 가난한 골목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었다. 소년도 골목길 아랫마을에 자리한 넓은 마당이 있는 고급 빌라에 살고 싶었다. 아니, 계단으로 이어진 집 들 중 아래편에 자리한 그나마 덜 낡은 집이라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학교에서 자신을 대신하여 반 친구들의 무시를 받아줄, 골목 가장 꼭대기 집에 사는 어떤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가장 가난한 꼭대기 집에 살아서 무시를 받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친구들의 비아냥거리는 놀림이 싫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가난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 싫었다. 소년은 자신도 고운 때깔의 반 친구들처럼 누군가를 놀릴 수 있는 무리에 속하고 싶었다. 친구들은 유행하는 옷과 가방을 가지고 있었고, 유명 학원에 다니며, 항상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선생님에게 예쁨을 받고, 저마다 서로 잘 어울렸다. 소년은 그것들 어느 하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 없었고 친구들이 함부로 놀려도 대들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위'에 위치한 아이들에게 대들어봤자 돌아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아래'인지 깨닫는 것뿐일 것 같았다.


  소년은 한참 끝에 한 계단을 내디디며 굳게 결심했다. 어른이 되면 꼭 돈을 많이 벌어서 고층아파트에 살고 말테다고. 그래서 '위'에 속하여 자신을 무시했던 친구들을 내려다보고 말겠다고. 한 계단 한 계단 밟으며 마음을 다졌다. 자신의 집, 가장 '아래'를 향해 계단을 힘겹게 올랐다.

 

  한 중년이 계단에 우두커니 서 있다. 그 계단은 오래전부터 변치 않고 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년은 계단에서 자신이 보낸 어린 시절을 추억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돌이켜봤다. 어린 시절 살던 꼭대기 집과는 달리 지금은 고층아파트에서 살지만, 변한 것은 크게 없었다. 여전히 삶이 벅찼고, 여전히 '아래'에 속한 무능력한 가장일 뿐이었다. 끊임없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오는 공장 부품들을 손질하는 일은 손에 익었지만 동시에 자신도 공장의 부품 일부로 맞춰져 갔다. 승진과 연봉 상승은 이제 꿈꿀 나이가 지나 곧 맞이할 정년퇴직을 겁내고 있다. 자신의 아이들이 좋은 학원을 보내주지 않는다고, 유행하는 브랜드 옷을 사주지 않는다고, 여느 친구들 아빠와 비교를 해대는 일상이 지친 날에는 이 계단을 찾아와 담배를 태우며  가슴속 한숨을 내뿜는다. 처진 어깨와 푹 숙인 고개가 그의 '아래' 삶의 무게를 증명하는 듯했다. 담배를 다 태운 뒤 그는 그렇게 삶의 무게를 지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며 '아래'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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