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영화를 보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과 ‘부럽다’는 생각을 동시에 합니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네.’로 시작해서 ‘비행기 타고 여행 가는 날이 올까?’ ‘내년엔 록 페스티벌이 열릴까?’ 등 영화의 장면이 바뀔 때마다 내용과 상관없는 마음의 소리가 따라다닙니다.
주인공이 열창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화면에 메인으로 잡히는 멋진 퍼포먼스는 뒷전입니다. 자꾸 눈길이 가는 곳은 무대가 아니라 객석이에요. 다닥다닥 붙어서 떼창하는 관객들의 모습은 공연보다 감동적입니다. ‘저럴 때가 있었지. 저 때가 좋았는데.’라고 읊조리며 다시 못 올 옛날처럼 그리워합니다. 이내 반신반의하며 ‘다시 저런 날이 오려나?’ 하는 질문인지 탄식인지 모를 혼잣말을 이어갑니다.
(영화관 안에서의 거리두기는 사람과의 물리적 거리두기 외에 영화 내용과도 일어나고 있어요.)
여성 영화제를 보러 갔어요. 영화관 입구에서 그리고 상영관 앞에서 총 2회의 발열 체크와 큐알코드 출입 인증을 하고서야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으니 내 양옆으로 세 자리씩 앉지 못하게 띠를 둘러놓았더라고요. 배가 고파서 에너지바와 음료수를 챙겨 왔는데 깜깜한 상영관이지만 음료를 마시려고 잠시라도 마스크를 벗는 행위가 주위를 불안하게 할까 봐 결국 영화 보는 내내 음료수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팝콘을 먹고 아이스커피를 홀짝이며 영화를 보던 추억은 유년 시절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어요.
물을 사 먹는 날이 올까? 란 어린 시절의 상상은 보란 듯 현실이 되었죠. 브랜드가 달린 공기를 사는 날이 오겠지? 마스크로는 부족해서 아예 헬멧에 산소통을 연결해서 쓰고 다니려나? 사람들이 헬멧을 꾸미는 걸 좋아해서 결국엔 얼굴 모양을 자유자재로 꾸미고 바꿀 수 있는 3D 화면이 달린 헬멧을 쓸 거야. 건강, 보건, 환경문제로 쓰기 시작했지만 다른 이유로 헬맷을 벗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한번 시작하면 끝없이 뻗어가는 공상이 현실의 모습으로 나타날까 불안이 엄습합니다.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날이었어요. 동호대교를 건너는 데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이 스크린인 것만 같았어요. 영화에서 디스토피아 도시를 표현하는 색과 질감 그대로였습니다. 바로 앞에 가는 차도 안 보일 만큼 뿌옇기만 한 미지의 공간으로 나아가는 데 그 길 끝에는 회사가 아닌 다른 세계로 이어질 것만 같았죠.
얼마 전에는 미국 서부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산불 피해 면적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음에도 계속 번지고 있어 주황의 세상이 되어 버린 서부 곳곳의 사진과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나온 주황색 도시 장면을 그대로 현실에 붙여 넣은 것 같았어요. 영화를 보며 몽환적이라고 느꼈던 장면을 현실로 마주하니 섬뜩합니다. 영화 제목처럼 2049년은 되어야 맞닥뜨릴 줄 알았는데 29년을 앞서 맞이한 미래 같은 현실은 서스펜스 그 자체입니다.
이제 SF를 예전처럼 편안하게 즐길 수 없어요. 미래를 그린 영화는 현실이 되어가고 현실은 영화 속 낭만으로 남았습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장마와 태풍, 코로나의 심각한 확산 속에 우리가 겪은 여름은 기후 위기의 체험판 같았습니다. 쨍한 여름의 기억을 상실한 채로 여름을 보내야만 했어요. 이전과 모든 게 달라진 현실에서 예년 그대로의 가을 하늘을 마주하니 감격에 앞서 모든 감각이 그저 아득해집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혼재 속에서 뒤틀린 감각은 초현실적입니다. 줌(Zoom)으로 회의하고 각종 모임을 하다가 숭아의 편지를 쓰고 답장을 받을 때면 이와 비슷한 감각을 느끼곤 했어요. 만날 수 없어 편지를 주고받는 건 오래된 옛날 방식이니까요. 우편까진 아니어도 실시간 영상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대에 글로 마음을 전하는 교류는 퍽 아날로그적이죠.
게다가 만나기가 어려워 시작한 편지는 만나서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게 했습니다. 서랍 속에 깊숙이 넣어두고 잠가 버린 빛바랜 이야기요. 한 번쯤은 친구와 밤새도록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은 나의 이야기, 같이 생각해보고 싶은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련해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이야기보따리를 풀게 할 질문으로 편지를 맺었습니다.
숭아의 편지를 받으며 친구들은 때로 놀랐을 겁니다. '숭아가 이런 일을 겪었구나!' 혹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요. 답장을 받은 나 역시 그랬습니다. '친구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랬구나, 이랬었구나.'
친구들이 답장에서 간간이 근황을 전할 때 코로나로 어려워진 생활과 생계의 고단함, 혹은 가족에게 생긴 안 좋은 상황을 알려주기도 했어요. 이럴 때마다 편지가 더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문득 생각나 잘 지내냐고 카톡으로 안부를 물었다면 그럭저럭 지낸다는 답이 왔을 거예요.
먼 훗날 우리가 웃으며 이 시기를 이야기하는 날이 아마도 오겠죠. 친구가 말할 겁니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어. 나 진짜 힘들었어."
그러면 나는 그런 일이 있었냐며 정말 힘들었겠다고 몰라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 "맞아. 너 그때 참 고생 많았지. 그 시절 다 이겨내고 장하다. 잘 살았다. 내 친구."라고 맞장구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편지가 거듭될수록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정서가 꾸덕해져 갔어요. 친구들을 만날 수 없는 현실에서 제대로 발효되어 가는 우정을 지켜보는 일은 숨 막히는 현실을 버티게 하는 나의 숨구멍이었습니다.
전 세계가 디스토피아로 기억할 2020년에 우리만의 작은 초현실을 마련했던 숭아의 편지를 두고두고 기억할게요.
덩이덩이 올라오는 이야기를 캐고 나누며 그대를 몹시 그리워한 여름 그리고 가을을 보내며
숭아.
이번 질문은 코로나 혹은 기후위기 이후 달라진 나의 일상입니다.
그리고 숭아의 편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와 그 이유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