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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는 게 별 거 Oct 27. 2020

작은 세계를 탈출하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서 벗어날 때

쇼윈도에서 맘에 드는 시계를 발견했어요. 은색 숫자가 새겨진 검은색 시계 판에 검정 가죽 줄로 된 시크한 시계였죠. 스페인에 있을 때였고 극도의 절약을 하던 시기였는데 그 시계는 마음에 쏙 드는 거예요. 가게에 들어가서 시계를 차 보면 시계를 풀 수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다독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잠자리에 누우니 시계가 눈앞에 둥둥 떠다닙니다. 


사? 말아? 사? 말아? 상상의 나뭇잎을 하나씩 뜯으며 며칠 동안 그 가게 앞에서 서성였어요. 어느 날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갑니다. 밖에 진열된 까만 시계를 보여달라고 했어요. 매가리 없이 가는 내 손목에 대니 시계가 쇼윈도에서보다 더 크게 보이더라고요. 작은 사이즈도 있는데 보여줄까 권유하는 점원에게 난 큰 게 마음에 든다고 답했습니다. 그녀가 웃으며 말합니다. “맞아. 큰 게 예쁘지. 수뻬르출로!” (superchulo = colloquial really cute, really lovely) 


그날부터 까만 시계를 애지중지 끼고 다녔어요. 시계 하나로 패셔니스타가 된 기분이었죠. 주위 친구들도 내 시계를 알아보고 멋지다고 칭찬해주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올 무렵엔 거의 보물 1호급에 해당하는 애장품이 되었죠. 그러나 서울에 온 나의 애장품은 수난을 겪기 시작합니다. 내 시계를 본 다수의 사람이 동일한 한마디를 던졌거든요. “너 왜 남자 시계 차고 다녀?” 


그 말이 내겐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내 시계가 큰 시계라고는 생각했지만 한 번도 남자 시계라고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스페인에서 점원이 '작은 사이즈'라고 말했던 시계가 한국에서는 '여성용 시계'로 표현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내가 큰 시계를 차겠다고 했다면 “손님, 그건 남성용 시계입니다. 여성용 시계는 이거예요.” 하고 작은 사이즈를 내밀었을 겁니다.


남성용 여성용의 구분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큰 사이즈와 작은 사이즈였을 땐 그저 선택의 문제였는데 남성용 여성용으로 이름을 붙이는 순간 선택을 제한시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근래에 남성 의류를 즐겨 입게 되어서입니다. 이전에는 남성 의류 매장에 가도 골라주기만 할 뿐 내가 입을 옷으로 바라보지는 않았거든요. 변화는 남동생이 준 티셔츠에서 시작됐어요. 온라인 쇼핑으로 구매한 티셔츠가 작으니 누나가 입으라며 동생은 제게 티셔츠 두 벌을 줬습니다. 입어보니 세상 편한 게 아니겠어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려도 배나 허리가 보이지 않고 두 팔로 무슨 동작을 해도 몸을 제한하는 게 없는 거예요. 디자인도 예쁘고 옷감도 좋고 무엇보다도 활동을 자유롭게 하는 옷이라 계속 손이 가더라고요. 이렇게 좋은데 남성의류라는 이유로 이전엔 살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던 거죠.


요즘 자주 입는 옷을 보면 남동생이 준 티셔츠 두 벌과 허벅지 부분의 통이 넓은 바지 두 벌, 그리고 같이 사는 오드리의 7부 면바지(내가 입으면 9부) 정도예요. 미니멀 라이프의 결과라면 좋겠지만 옷장을 열어보면 기존에 입던 옷들이 옷장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정작 입는 옷은 몇 개 안 되는데 옷이 왜 이렇게 많나 싶어서 조사에 들어갔지요. 여름 상의를 모조리 끄집어내서 세어 봤습니다. 결과는 반팔 상의 22벌, 나시 상의 12벌이었어요. 믿기지 않죠? 이렇게나 많다니…. (할 말 잃음) 


옷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대체로 사이즈가 작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프리 사이즈가 아닌 경우는 죄다 XS 아니면 S입니다. S 사이즈에 집착하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 보니 키즈 라인에서 구매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사이즈가 작네요.

 

얼마 전 구슬을 꿰다 문득 양팔을 몸통에 본드로 붙여놓은 것처럼 꼭 붙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어요(요새 비즈공예에 빠져 있어요). 바로 날개를 퍼덕이듯이 팔을 펄럭거리며 몸의 긴장을 풀어줬습니다. 구슬 꿸 때만이 아니라 글을 쓸 때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책상에 앉아 어떤 작업을 할 때마다 팔을 몸에 딱 붙이고 있는 거예요. 이런 목각인형 같은 자세는 목과 어깨에 긴장을 유발합니다. 왜 이렇게 경직되어 있지? 언제부터 이런 자세에 익숙해진 거지? 의문투성이였는데 옷을 보니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회사에 입고 다녔던 블라우스는 얼마나 타이트한지 그 옷을 입고 기지개는커녕 요가에서 하는 흉통을 들어 올리는 호흡만 해도 단추가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옷에 편히 숨 쉴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어요(동시에 블라우스의 단추를 다 떨어뜨릴 수 있을 만큼 흉통을 늘리면서 깊은 호흡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팔을 펄럭거리는 움직임은 단연 불가하죠. ‘이렇게 불편한 옷을 입고 일을 했었구나.’ 뒤늦은 깨달음은 탄식을 불러옵니다. 


아... 내 몸을 괴롭히던 게 브라와 팬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 작은 옷들이 내 몸을 옥죄어 왔다는 사실을 옷장을 정리하며 확인했습니다.

“몸아~ 미안해.”


사이즈가 애매해 두 사이즈 사이에서 고민할 때면 작은 사이즈를 사서 옷에 몸을 맞추려고 했던 지난날이 떠올랐어요. 비록 여러 이유로 소비를 멀리하는 요즘이지만 몸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낙낙한 티셔츠 두 벌을 샀습니다. 옷 안에서 춤을 춰도 될 만큼 헐렁헐렁한 옷입니다. 오드리와 같이 입을 생각이에요. 이미 두 옷 중 한 벌은 오드리가 잽싸게 개시했습니다.


간만에 새로 산 옷을 입고 외출하니 어깨춤이 들썩입니다. 지하철에 탔는데 20대로 보이는 남성의 옆자리가 비어서 앉았습니다. 신장도 체중도 평균으로 보이는 남성이었어요. 의자 등받이에 기댄 남성의 어깨선도 벌린 다리도 내 자리로 넘어와 있었습니다. 나는 앉자마자 옆에 앉은 상대와 몸이 닿는 걸 피하려고 몸을 움츠렸어요. 등받이에 기대지 않도록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다리도 오므렸습니다. 생각이고 뭐고 하기 전에 몸이 알아서 그렇게 반응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생각했습니다. 옆 사람은 자신의 칸을 넘어서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사람이 와서 앉아도 왜 칸에 맞춰서 몸을 조정하지 않는 걸까? 옆 사람이 불편할 거라는 생각을 못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어 나는 왜 상대가 불편하지 않도록(동시에 나도 불편하지 않도록) 알아서 몸을 움츠리는 건가? 


나도 1인분의 공간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자세를 바꿨습니다. 어깨를 쫙 펴고 등과 허리를 의자에 바짝 붙였어요. 옆 사람과 어깨선이 닿았지만, 몸이 펴진 상태를 즐기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오므렸던 다리도 벌려서 골반 넓이에 맞게 11자 라인으로 앉았습니다. 옆 사람과 신체의 일부가 닿았겠지만 그럼에도 몸을 쫙 펴고 1인분의 공간을 다 누리니 온전한 1인이 된 듯한 느낌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어요. 


평소에 피트한 옷을 주로 입는다면 주말에 하루쯤은 헐렁한 옷으로 내 몸에 자유를 선사하면 어떤가요? 헐렁한 옷이 없다면 남자 가족의 옷을 빌려 입는 것으로 시작해보세요. 남자 가족이 없다면 하나 정도는 구매하는 것도 추천합니다. 사지를 쭉쭉 펴고 몸을 마음껏 흔들어봐요. 내 몸에 쌓여 있는 모든 긴장이 훅훅 떨어져 나갈 수 있도록. 




이번 질문은 작은 세계를 탈출한 경험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에서 벗어난 경험이 있나요?

아니면 벗어나고 싶거나 탈출하고 싶다고 느끼고 있나요?


나를 가두는 작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 혹은 탈출한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담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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