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주위를 살피는 나를 발견할 때
생일을 맞은 엄마에게 쓴 아홉 살 딸아이의 편지를 보았습니다. 또박또박 쓴 글씨에는 정성을 담아 눌러쓴 흔적이 역력했어요. 편지를 즐겨 쓰는 아이는 엄마에게 생일 선물을 사주고 싶었으나 선물로 편지를 받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평소보다 심혈을 기울여 편지를 쓴 듯했습니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인 주제 아래 기억에 남는 구절은 이러합니다.
우리도 돌보고 밥도 차리고 해서 너무 힘들지?
내가 많이 도와주고 싶어. 안마 더 많이 해 줄게.
나는 엄마가 항상 매일매일 고맙고 사랑해.
엄마를 위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이 편지를 보고 짠했습니다. 어른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살피려는 이 아이의 마음을 대할 때마다 나는 감동하기에 앞서 서글프거나 속상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나의 조카이기도 한 이 아이는 어쩌면 시가 식구 중에 가장 나를 챙기고 나에게 마음 쓰는 사람입니다.
아이가 여섯 살 무렵이었을 겁니다. 여느 때처럼 모여 가족 식사를 하고 나와 카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차를 다 마신 후 다들 일어났고 카페를 나섰어요. 맨 안쪽에 앉아 있었던 나는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나와 누군가가 두고 간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려고 가족들이 앉았던 자리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다들 밖으로 나갔는데 이 아이만 테이블 옆에 서서 나를 지켜봅니다.
“연두야, 안 가고 왜 여기에 서 있어?”
“외숙모 기다려요. 다들 너무해. 외숙모는 여기 있는데 먼저 가버렸어.”
별생각이 없었던 나는 아이의 대꾸에 흠칫 놀랐습니다. 아이는 괜찮다고 말하는 내 손을 꼭 잡고 걸었습니다. 주차장에 있는 삼촌을 발견하고서 아이는 삼촌을 꾸짖습니다.
“삼촌은 외숙모가 안 나왔는데 먼저 가버리면 어떡해?”
어리둥절하던 삼촌은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다고 엉겁결에 조카에게 사과합니다.
차를 타고 집에 오면서 생각했어요. 그 모임에서 서열이 꼬라비인 나를 챙기는 이 아이의 마음에 대해 그리고 분위기를 파악하고 누군가를 돌보려는 아이의 행동에 대해. 나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른 사람을 챙기는 이 아이의 마음과 행동은 어른스럽고 다 컸고 착하다는 칭찬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이러한 칭찬이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기보다 같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분위기를 좋게 하려 애쓰고, 드러나지 않게 소외되거나 고생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방향으로 아이의 에너지를 몰아갈까 염려됩니다.
이 아이와 있는 순간에 나는 종종 멈칫합니다. 아이에게 감동하기 전에 멈칫, 아이에게 칭찬하기 전에 멈칫. 고맙다는 말은 이미 눈치가 빠른 아이에게 타인의 기분과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을 배가시킬 것 같고 다 컸다는 말은 아이에게서 아이다움을 앗아갈 것만 같습니다.
엄마에게 처음 해줬던 생일선물이 기억납니다. 여섯 살의 나는 집 근처 가게에 가서 컬을 살려주는 헤어로션을 샀습니다. 엄지손가락으로 누른 것처럼 움푹 파인 굴곡이 세 개 있는 살구색 플라스틱 용기가 기억납니다. 엄마에게 생일선물을 꼭 사주고 싶어 용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았었습니다. 아빠의 생일 선물을 늘 챙기는 엄마와 달리 외식만 할 뿐 엄마의 생일 선물을 챙기지 않는 아빠 때문이었는지 나는 유달리 엄마의 생일 선물을 챙겼습니다.
선물은 작은 일화에 불과합니다. 아빠가 엄마에게 상처를 줄 때면 엄마를 위로하려 했고 때로는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아빠가 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내가 대신해주려는 마음이 늘 있었던 것 같아요. 유년기부터 성인이 되기 전까지 나는 가족사에서 줄곧 엄마의 시각을 대리해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한 건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엄마가 내색하지 않아도 엄마의 감정을 짐작했고 엄마의 고단함과 속상함을 풀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엄마는 충분히 힘들기 때문에 나까지 엄마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내 안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어요. 내가 반장이 되면 엄마는 어머니회에 참여해야 하고 어머니회 활동을 싫어하는 아빠와 다툼이 예상되기에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는 반장 후보로 추천되면 바로 기권했습니다.
외식하러 가서는 4인분을 시키는 것에 망설이는 엄마를 보며 엄마가 주문하기 전에 내가 나서서 엄마의 고민을 덜어주었어요. 나는 한 그릇을 다 못 먹을 것 같으니 엄마랑 같이 먹겠다고 말하면 엄마는 그제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안히 3인분을 시켰습니다. 엄마와 나는 먹는 것만 한 그릇이 아니라 대체로 한 그릇 안에서 살아온 듯합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엄마가 난처하지 않도록 내가 먼저 나서서 행동하거나 알아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감정은 지금도 나의 감정과 면밀히 이어져 있어요. 우리 사이의 탯줄은 끊어지지 않은 건가 싶기도 합니다. 여하튼 가계 재정에 부담을 주거나 아빠와 싸움이 예상되는 나의 바람은 대체로 지웠습니다. 그리고 나는 원래 바라지 않았던 것처럼 나에게 주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애어른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카드 뉴스에서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엄마의 삶이 너무 고단하고 힘들어서 그 감정이 끊임없이 밖으로 새어 나올 경우 그 감정의 봇물을 받아 고인 물로 담는 것은 아이다. 아이 중에서도 특히 딸이 엄마의 감정을 예민하게 알아챈다. 엄마는 딸을 자식이 아닌 어린 자신으로 대하기 때문에 딸 또한 엄마의 감정을 타인이 아닌 자기감정으로 착각하기 쉽다. 만약 엄마 스스로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아이에게 풀면 딸아이는 나이가 들어서도 엄마를 살피듯 자기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을 살피기에 급급해하며 살아가게 된다. 엄마가 무의식적으로 딸에게 대물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때 엄마와 딸 모두가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자신을 온전히 회복하고 실현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일본 드라마 <나기의 휴식>과 강화길의 단편소설 <음복>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나기의 휴식>의 주인공 나기는 어떤 분위기이든 공기처럼 스미려 하고 누구와 있던 상대의 기분에 맞춰주는 캐릭터입니다. 항상 인자하게 웃고 있는 나기는 미소 짓는 한 가지 표정만 존재하는 인형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은 숨기고 자신이 상처 받는 것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감정을 맞춰주지 못했을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나기는 왜 저렇게까지 말하지 않은 상대의 마음을 알아채고, 요청하지 않아도 알아서 상대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을까 궁금할 무렵 드라마는 나기와 나기 엄마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엄마와 단둘이 살아온 나기는 자신의 마음과 상관없이 엄마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기분보다 엄마의 기분에 맞춰 살아왔다면 상대의 기분이 어떤지 살피는 건 나기의 일상이었겠지요. 상대가 기분이 괜찮아야 나기의 기분도 괜찮아졌을 테니까요.
<음복>은 한 신혼부부가 결혼 후 첫제사에 참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으로 참석한 시가의 제사에서 부인은 30년 넘게 남편이 눈치채지 못한 집안의 이상한 공기를 읽어냅니다. 이상한 공기를 읽어내는 그녀의 기이한 능력은 어디에서 온 걸까요?
나는 조카를 보며 어렴풋이 그 답을 찾습니다. 어른의 마음을 헤아리는 연두의 모습에서 어린 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가족 중에 특히 연두를 면밀히 관찰하게 되는 건 연두를 향한 애정이자 어린 나에 대한 애정일지도 모릅니다. 연두가 자신의 에너지를 타인보다 자신에게 쏟고 주변의 공기를 살피는 것보다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 더 충실하게 자랄 수 있을까요? 연두에게는 가족 누구를 대할 때 보다 섬세하게 고르고 고른 언어를 사용하리라 다짐합니다. 고르다 고르지 못해 과묵한 숙모가 되더라도 말이죠.
이번 질문은 나보다 주위를 살피는 나를 발견할 때입니다.
주위(가족, 애인, 친구)를 살피기보다 나에게 더 집중하게 된 계기나 방법이 있다면 나눠주세요.
엄마와 나의 이야기, 혹은 나와 딸의 이야기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