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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는 게 별 거 Oct 27. 2020

나를 데리고 사는 법

체해서 3일을 죽만 먹었어요. 나는 갖가지 이유로 자주 체합니다. 밀가루 음식을 연달아 먹어서, 찬 음식을 먹어서, 신경을 많이 쓰거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이외에도 먹자마자 잠들면 바로 체하는 스타일입니다. 한 번 체하면 3일은 기본으로 아프고 더 오래가는 경우도 많아요. 이런 몸뚱이로 여태껏 살아낸 게 용하다 싶을 만큼 매사에 일관되게 허약한 편입니다(원치 않는 포인트에서 일관적이군요). 


처음 만난 사람도 한눈에 알아보죠. 약체라는 걸. 동물의 세계에 살았더라면 많은 포식자가 노리는 먹잇감이었을 거예요. 별 노력 없이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만만한 쪼꼬미. 다만 비리비리해서 신선한 느낌은 아니겠죠. 그저 주린 배를 채우는 느낌일 것 같습니다.


체하면 배가 아픈 것보다 편두통이 더 고통스러워요. 못 먹어서 기력이 없기도 하지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기에 움직이지 못하고 대체로 누워있습니다. 이럴 땐 몸을 살살 달래야 합니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온수 팩을 배에 올려두고 볼펜처럼 생긴 침으로 손발을 따고 소화에 도움이 되는 혈 자리를 누르고 배가 뭉친 곳을 수시로 문질러요. ‘엄마 손은 약손이다.’ 할 때처럼요.


아파서 몸져누운 행위에는 익숙하지만 아플 때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은 참아지지 않아요.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은데 이렇게 허송세월 누워있는 게 답답합니다. 이미 잡힌 일정을 미뤄야 할 때면 아프다는 이유로 양해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아픈 것보다 더 싫을 때가 많아요. 요가 수업을 빠질 때도 그렇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요가를 하러 갔습니다. 수요일 수업을 빠지고 일주일 만에 하는데도 몸이 잘 열리는 거예요. 며칠간 먹는 양을 대폭 줄인 덕에 속을 비워내서인지 평소보다 몸이 유연했어요. 요가를 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아픈 건 자체 정화 작용인가? 아팠던 징후에 이어 몸이 잘 열리는 감각은 내가 그동안 속에 음식을 무리하게 넣은 반증 같았어요. 억지로라도 그렇게 비워내는 게 필요했나 봅니다. 


태어나서부터 잔병치레를 달고 살아온 나는 내 몸에 대해 아쉬움이 많아요. 친구들과 똑같이 놀아도, 동료들과 함께 야근하거나 회식 때 술을 마셔도 그다음 날의 에너지는 타인과 비교 불가합니다. 엔진 힘이 좋은 차와 경차가 고속도로에서 시속 140km 이상을 달릴 때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한때는 엔진 힘이 좋은 차를 꿈꾸고 부러워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키 크고 골격이 단단한 사람이 멋져 보입니다. 하지만 경차가 중형 세단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경차를 탄다면 언덕을 오르거나 고속으로 주행 시 힘이 달리는 걸 받아들여야 해요. 불평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애초에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걸 부러워한 것임을 뒤늦게 알아가는 중입니다.


요가 선생님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제가 마음에 새기고 있는 말이 있어요. 힘이 넘쳐서 좋은 것도 힘이 약해서 나쁜 것도 아니라고요. 힘이 좋은 사람이 그 힘을 다스릴 줄 모르면 오히려 화가 된다. 힘이 약한 사람은 몸의 반응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고 이런 감각을 살리면 몸을 바르게 쓰는 법을 익힐 때 큰 도움이 된다. 좋은 몸 나쁜 몸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자신의 몸의 특성에 맞게 사용하는 법을 익히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약한 몸을 아킬레스건으로 받아들여온 내게는 귀가 열리는 말이었어요. 


요가를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대로 따라 할 수 있는 요가 동작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몸이 많이 틀어지고 굳었어요. 다행히 선생님은 최종 동작을 흉내 내게 하지 않아요. 그 동작이 지향하는 몸 쓰기가 가능하도록 지금 나의 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과정으로서의 동작을 알려줍니다. 아마 요가원에 거울이 있었다면 내 모습이 하도 우스꽝스러워서 몰입이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손바닥이 천정을 보도록 두 팔을 펴는 동작이 있어요. 원래는 두 팔을 귀 가까이에 붙여야 하지만 나의 경우엔 그렇게 하면 가슴(명치 부위)이 펴지지 않고 구부러집니다. 그럼 선생님이 알려주죠. “숭아님은 팔을 다 뻗지 말고 팔꿈치를 구부린 채로 가슴을 펴는 데 집중하세요. 중요한 건 갈비뼈 하나하나를 벌려서 들어 올리는 겁니다.” 그러면 모두가 팔을 쭉 뻗어서 가슴을 들어 올릴 때 나는 팔을 구부린 채 명치를 펼치려고 애씁니다(이 동작에서 가슴이 구부러지면 팔을 펴는 건 의미가 없다고 해요).


요가를 하면서 나를 데리고 사는 법에 대해 자주 생각해 봅니다. 가슴을 펴지 못하면서도 두 팔을 빳빳이 펼치려고만 애쓰진 않았는지, 다른 사람들 모두 두 팔을 쭉쭉 뻗어도 과감히 팔꿈치를 구부려서 가슴을 펴는 데 집중할 수 있는지요. 


회사에 다닐 때마다 다짐했던 게 있어요. 에너지 배분을 잘해서 퇴근 이후에는 꼭 내 일을 하겠다고요. 글쓰기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번번이 실패한 다짐이었어요. 퇴근 이후에도 일 생각에 매여 있거나 체력이 바닥나 집에 오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소파에 쓰러지기 일쑤였습니다. 퇴근 이후와 주말 시간을 잘 활용해 자신이 원하는 분야로 진출하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볼 때면 한없이 작아졌어요. 


이제는 압니다. 안타깝지만 나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할 만큼의 체력을 갖고 있지 못하고 하나의 일에서 다른 일로 넘어갈 때 스위치 전환이 느린 사람임을요(한 가지 일에 몰입해서 파고 들어가는 성향이거든요). 그리고 요가 선생님의 말처럼 이 스타일 역시 좋고 나쁨의 문제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도요.


부족하거나 문제라고 여기는 부분을 바꾸려고 상당한 노력을 들였었어요. 대체로 좌절로 이어졌지요. 이제야 나는 나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나를 배려하려고 합니다. 체력이 약하니까 욕심을 줄이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몇 가지에 집중하려고요.


포기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어요. 적시에 하는 포기는 현명하다. 포기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 무리하게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제법 빠르게 포기합니다. 포기하는 횟수도 늘어났고요.


현재는 하고 싶은 일과 풀타임 직업을 병행하는 게 나에게 무리임을 인정하고 파트타임의 일을 구하고 있어요.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에너지가 많이 듭니다. 되도록 에너지가 충만할 때 사람을 만나는 게 상대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도 하고요. 그래서 매일 사람을 만나도록 일정을 잡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건씩 다른 약속들로 하루를 채웠던 20대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지요. 


먹는 것도 조절이 필수입니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만, 어제 면을 먹었다면 오늘은 밥을 먹고, 찬 음식을 먹었다면 음료라도 따뜻한 걸 마셔요. 커피를 좋아하지만, 속이 편안하지 않을 때는 차로 대신합니다. 이런 노력을 기울여도 아프긴 해요. 그래도 빈도는 줄어듭니다. 


아픔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어요. 체한 건 속을 비우라는, 몸살은 에너지를 아끼고 충전하라는 신호입니다. 일종의 몸의 파업이죠. 나와 협의하지 않은 자체 휴가. 협의보다 자체 휴가 통보가 몸을 정상 시스템으로 유지하는 데 효율적이란 생각을 합니다. 쓰다 보니 자주 아픈 건 몸이 똑똑한 건가?라는 생각에까지 가닿네요. 


나이를 허투루 먹은 건 아닌가 봅니다. 나를 데리고 사는 노하우가 늘고 있으니까요. 어쩔 수 없으니 데리고 살긴 하는데 나도 나를 데리고 사는 게 때때로 피곤하고 귀찮아요. 하지만 나니까 이런 나라도 어여쁘게 봐주렵니다. 데리고 사느라 고생이 많다. 숭아!




이번 질문은 나를 데리고 사는 나만의 노하우입니다.

나의 체력, 성격, 기질, 일하는 방식, 사람을 대하는 스타일 등 

자신의 특징에 맞춰 사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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