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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는 게 별 거 Oct 27. 2020

밥 먹고 갈래요?

꼬깃꼬깃해진 나를 좌르르 펼치게 하는 힘

문자로 대화 중이었어요. 첫 번째 회사를 관두고 진로 고민에 더하여 연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자정이 되어 갑니다. 갑자기 배가 훅 꺼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배고프다.”


맥락 없이 대화에 침투해 대화의 맥을 마비시킨 바이러스 신호를 친구에게 보냈습니다. 잽싸게 날아온 친구의 백신 처방.

“우리 집으로 건너와.” 


한밤에 가까운 시간이었고 친구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친구와 놀다가 밤늦게 친구 집에 살곰살곰 들어가서 친구 방에서 같이 자고 아침에 천연덕스럽게 친구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아침밥까지 얻어먹고 온 적도 있지만, 그때는 친구와 함께였고요. 저 혼자 밤 방문은 처음입니다. 하지만 쿵작이 잘 맞는 우리는 즉흥적입니다. 건너오라는 한 마디에 쪼르르 달려갑니다. 슬리퍼를 끌고 나와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친구가 산다는 건 신나는 일입니다. 집 앞에서 전화를 걸어 숨죽여 말합니다.

“집 앞이야.” 


친구가 반갑게 문을 열어줍니다. 깜깜한 거실 속에서 튀어나온 친구의 환한 웃음이 달처럼 밝네요. 비밀 연애하는 애들처럼 서로 키득키득 웃으며 좋아합니다. 다른 가족들이 깨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들고 종종 걸어서 부엌으로 갑니다. 친구는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더니 팬에 기름을 둘러서 김치를 볶습니다. 냄새가 예술입니다. 기가 막힌 냄새에 친구 가족들이 깨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허기가 가실만큼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냥 행복합니다. 손이 빠른 친구는 뚝딱 김치볶음밥을 내옵니다. 


집에 가면 밥을 산처럼 쌓아주는 친구에게 나는 ‘고봉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어요. 친구가 해주는 고봉밥은 영혼을 살찌우게 합니다. 입으로 후후 불며 김치볶음밥을 순식간에 해치웠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애인도 직장도 없어 우울해하던 우리의 서글픔은 고슬고슬한 밥알 사이로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잘 키운 친구 하나, 열 애인 안 부러운 순간입니다.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 볼까요? 스페인으로 연수를 가는 길에 먼저 영국에 들렀습니다. 영국에서 연수 중인 친구가 있었거든요.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친구를 보겠다고 한 살림 꾸려온 거대한 이민 가방까지 대동하고 호기롭게 영국에 도착했습니다. 런던에서 짐을 푼 후 기차를 타고 친구가 있는 런던 남쪽의 작은 도시로 갔어요. 기차역에 마중 나온 친구를 만났는데 얼굴만 봐도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지더라고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나누며 친구가 머무는 기숙사로 걸어갔어요. 


친구의 방을 둘러보고 기숙사 부엌으로 향했습니다. 잠깐 기다리라며 친구가 냉장고로 가더니 온갖 재료를 꺼내 오는데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파스타 재료일 줄 알았는데 호박에 된장에 불고기에 김밥 재료까지 늘어놓는 게 아니겠어요? 친구가 온다고 멀리 떨어진 아시안 마트까지 가서 이 음식 재료들을 다 구해온 거예요. 기숙사 사는 친구들도 신기한지 오가며 흘낏흘낏 쳐다봅니다. 영국에 와서 친구가 싸주는 김밥을 먹게 될 줄이야. 


나도 친구도 그날 처음 김밥을 말아봤어요. ‘김밥 뭐 있어? 재료 다 때려 넣고 말면 되지.’하고 만만하게 봤지요. 말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썰기만 하면 옆구리가 터지는 거예요. 옆구리가 터졌을 뿐인데 왜 그렇게 웃음이 터지는지 한 손에 칼을 든 채로 배꼽 잡고 웃었습니다. 기숙사 사는 친구들이 무서웠겠네요(그때 <킬링 이브>가 나왔더라면 한층 무서웠을 텐데). 온전한 김밥이 한 줄도 없었지만 그 기숙사에서의 김밥이 나의 인생 김밥입니다. 친구와 도시 구경도 했는데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건 기숙사 부엌을 장악한 된장찌개 냄새와 옆구리 터진 김밥이에요. 


친구도 부엌에서 기숙사 사람들이 싫어하는 냄새가 날까 봐 좀처럼 한국 음식 해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가 이참에 한식 냄새로 기숙사 부엌을 점령해 버리니 의기양양합니다. 한식 만찬을 거나하게 즐기고 좁은 기숙사 침대로 기어들어 와 나란히 누웠습니다. 타향살이의 시작이 훈훈하죠? 스페인 가서 초반엔 고생이 많았는데 이때 영국에서 친구와 보낸 시간이 나에겐 예방주사였어요. 


원가족과 떨어져 산 지가 원가족과 함께 산 세월만큼 흘렀네요. 가족들과 떨어져 산 지 오래되어 그런가 집밥을 생각하면 애틋합니다. 집 떠나 사는 친구들 사이엔 일종의 ‘밥의 연대’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반찬 택배를 받는 날은 그 집에 모이는 날이죠. 또 하숙하는 친구 방에 놀러 가서 자고 올 때면 친구 대신 내가 아침밥을 먹곤 했어요. 그때만 해도 친구는 아침밥을 자주 걸렀거든요(지금은 잘 챙겨 먹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아침에 부스스하게 일어나 집에 가려고 나서면 친구는 잠결에도 한 마디 던집니다. “내 대신 아침밥 먹고 가라.” 


밥의 연대에는 ‘우정’이라는 단어로 다 표현하기 힘든 끈끈한 정서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왜 그렇게 전화할 때마다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지 이제는 알아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차려준 따뜻한 밥을 먹으면 밥의 온기가 내 몸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갑니다. 그 온기는 사회생활하면서 이리저리 치이고, 서울살이 하면서 꼬깃꼬깃해진 나를 다시 좌르르 펼치게 합니다. 그래서 원주만 가면 과식을 하나 봐요. 엄마 밥은 김치만 얹어 먹어도 맛있잖아요. 


이런 온기가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서슴지 않고 묻게 되었습니다.

“밥 먹고 갈래요?” 


라면 먹고 갈래요? 만큼 유혹적이지도, 차 한잔할래요? 만큼 세련되지도 않지만, 고민이 있거나 어깨가 축 처진 지인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이 말이 나와요. 청소를 안 해서 집도 더럽고 집에 딱히 먹을 게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데려옵니다. 버섯볶음이라도 아니 계란 프라이라도 후다닥 해서 밥상을 차립니다. 밥, 김치, 김, 방금 만든 반찬 하나가 전부인 단출한 밥상이지만 밥을 먹는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하던 이야기를 이어 들어요. 밥을 먹고 나면 아까 밖에서 이야기할 때보다 친구의 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입니다. 배부른 표정으로 현관을 나서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 내 마음도 도닥여집니다. 


집밥이 애틋해질수록 생각나는 사람이 있죠. 몇 년 전부터 엄마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주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우리 집에 올 때면 찬이 변변치 않아도 밥을 차려주려고 합니다. 타인이 자신을 위해 차려준 밥을 먹어 볼 일이 별로 없을 그녀를 위하는 내 나름의 방법입니다. 


가뭄에 콩 나듯 카톡으로 “하와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쥬?”를 반복하던 친구들과 이렇게 편지를 나누면서 카톡으로는 차마 꺼내지 못했던 지금의 근황, 고민, 어려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편지로 근황을 자세히 알게 되어 무척 좋으면서도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밥 먹으러 와요” 


갓 지은 밥을 차려 놓고 친구 이야기를 실컷 들어주고 싶은 날입니다. 오며 가며 편히 들릴 수 있게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오픈 식당을 해볼까? 그럼 메뉴를 뭐로 하면 좋을까? 특별히 재료를 준비하지 않고 늘 상비된 재료로 뚝딱 할 수 있는 요리가 뭐가 있을까? 내가 생각해 본 메뉴는 감자전, 야끼우동, 메밀소바, 골뱅이 겨자 냉채, 팽이버섯전, 오코노미야끼, 버섯 샐러드 정도예요. 물론 이것도 3개 이상이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요. 메뉴 괜찮나요? 추천할 만한 쉽고 맛난 요리가 생각나면 알려 줘요. 금세 뚝딱 할 수 있는 메뉴를 개발해야겠어요.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으면 연락해요. 오며 가며 들려요. 사는 게 고달플 때면 멀어도 놀러 와요. 밥 먹고 가요.

 

추신 : 

나의 허기를 온기로 채워준, 

요리이자 마음을 내어 준, 

친구들에게 깊은 사랑을 전합니다. 

그대의 음식이 나를 단단히 지탱하게 했어요. Love you!




이번 질문은 당신의 소울푸드입니다.

마음의 허기를 채워준 당신의 소울푸드 에피소드를 들려주세요.

이럴 때 이런 음식, 이런 식당도 좋고요.


당신이 5개 메뉴만 있는 심야식당을 운영한다면 어떤 메뉴로 구성할지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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