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암묵적 동의가 아니라 정중한 거절이다.
염치 불구하고 지난날을 회상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학교 밖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4권 정도 됐었는데,
같은 반에 그 도서관 근처 사는 친구에게 반납을 부탁했다.
그 친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았다고 했다.
반에서 인기 많고 반 분위기를 주도하는 친구였는데,
나의 염치없는 부탁을 들어줬다.
그때는 그 친구가 어려서, 순수해서, 착해서
그 부탁을 들어준 것 같다.
지금은 나도 그런 부탁을 안 할 뿐 아니라,
그 친구도 합리적인 거절을 했을 것 같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책 4권의 반납은 내가 할 일이었다.
그 친구에게 맡길 일이 아니었다.
그 친구도 집에 들렀다가
도서관에 가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내가 배워 온 세계는 드라마로부터여서 그랬을까?
드라마에서 책 반납을 부탁하는 장면을 본 것 같다.
그렇게 해도 되는 일 같았고, 염치라는 걸 몰랐고,
거절하면 내가 가면 되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 사람에게 부담을 준다는 생각 자체를 그때는 못했다.
이런 일은 성인이 돼서도 반복됐다.
대학교 동기네 집에서 놀다가 자고 가도 되냐고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 동기는 거절의 의미를 보냈던 것 같다.
나는 그걸 몰랐다.
나는 그 침묵을 암묵적 동의로 내 마음대로 해석했다.
어느 날은 그 동기에게 같이 놀러 가자고 말했다.
그 동기는 알겠다고는 했지만
약속 전 날 가고 싶은 장소를 공유할 때는 또 침묵했다.
카카오톡을 읽으면서 답장은 하지 않았다.
결국 답장해달라고 카톡을 보내고..
내가 매달리다시피해서
억지로 그날 같이 서울에 놀러 갔다 왔다.
하지만 그 동기는
내게 기분 상하거나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아주 먼 사이가 된 것이 반증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깨달았다.
침묵은 암묵적 동의가 아니라 정중한 거절이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침묵이 곧 동의라는 생각과 함께
정중한 거절일 수도 있음을 염두해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