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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민 Feb 18. 2022

침묵은 암묵적 동의가 아니라 정중한 거절이다.

염치 불구하고 지난날을 회상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학교 밖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4권 정도 됐었는데,

같은 반에 그 도서관 근처 사는 친구에게 반납을 부탁했다.


그 친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았다고 했다.


반에서 인기 많고 반 분위기를 주도하는 친구였는데,

나의 염치없는 부탁을 들어줬다.


그때는 그 친구가 어려서, 순수해서, 착해서

그 부탁을 들어준 것 같다.


지금은 나도 그런 부탁을 안 할 뿐 아니라,

그 친구도 합리적인 거절을 했을 것 같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책 4권의 반납은 내가 할 일이었다.

그 친구에게 맡길 일이 아니었다.


그 친구도 집에 들렀다가

도서관에 가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내가 배워 온 세계는 드라마로부터여서 그랬을까?

드라마에서 책 반납을 부탁하는 장면을 본 것 같다.

그렇게 해도 되는 일 같았고, 염치라는 걸 몰랐고,

거절하면 내가 가면 되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 사람에게 부담을 준다는 생각 자체를 그때는 못했다.


이런 일은 성인이 돼서도 반복됐다.

대학교 동기네 집에서 놀다가 자고 가도 되냐고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 동기는 거절의 의미를 보냈던 것 같다.

나는 그걸 몰랐다.

나는 그 침묵을 암묵적 동의로 내 마음대로 해석했다.


어느 날은 그 동기에게 같이 놀러 가자고 말했다.

그 동기는 알겠다고는 했지만

약속 전 날 가고 싶은 장소를 공유할 때는 또 침묵했다.

카카오톡을 읽으면서 답장은 하지 않았다.


결국 답장해달라고 카톡을 보내고..

내가 매달리다시피해서

억지로 그날 같이 서울에 놀러 갔다 왔다.


하지만 그 동기는

내게 기분 상하거나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아주 먼 사이가 된 것이 반증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깨달았다.

침묵은 암묵적 동의가 아니라 정중한 거절이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침묵이 곧 동의라는 생각과 함께

정중한 거절일 수도 있음을 염두해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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