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에는 3대 지옥이 있어.”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던 건 내가 인턴일 때였다. 매일 밤까지 회사에 남아있던 나에게 선배들은 갖가지 꿀정보를 알려주곤 했었다. 앞으로 너가 정직원이 되면 이 팀들만 피하면 된다는 것. 그리하면 네 앞날이 꽃길은 아니더라도 최소 지옥은 피할 수 있다는 것. 힘들다던 광고회사, 그중에서도 악명 높던 3곳의 지옥을 소개한다.
첫째, 가시지옥. 이 곳은 경력 높으신 CD님이 이끄는, 탄탄한 포트폴리오를 자랑하는 팀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팀원들은 매일 가시방석에 앉아있다. 그의 독설은 회의실에서 십분발휘된다. “넌 카피라이터하면 안되겠다.” “넌 끼도 많고 애가 참 밝은데 카피를 못 쓰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카피들을 직접 쓰신 그 분은, 지금은 카피라이터 감별사로 활약하신다.
둘째, 시간지옥. 일단 회의실에 들어갔다하면 나오는 사람이 없다,하여 붙은 별명이다. 도대체 대여섯시간동안회의실에서 뭘하는걸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 팀원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녀는 회의시간내내 가만히 있는다고했다. 일단 모두의 아이디어를 발표하면, 그때부터 CD님은 시간과 정신의 방으로 들어가신단다. 그 곳에서 차근차근 혼자서 아이디어를 정리할 동안 팀원들은 핸드폰도 하고, 서로 눈짓도 주고받고, 저녁메뉴도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불지옥. 이곳은 일이 불이 난 듯 많아 붙은 별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다혈질인 CD님의 성격에서비롯되었다고 한다. 온화해보이는 얼굴에 목소리를 가지신 CD님이라 상상이 잘 안되지만, 무릇 관료보다 백성의 말에 믿음이 가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 불지옥 대신 떠오르는 신흥지옥이 있다고 하니... 이름하야 한숨지옥, 바로 우리 팀이다.
떠오르는 한숨지옥의 풍경을 소개한다. 우선 정적 속에서 막내인 내가 가장 먼저 아이디어를 발표한다. 회의실은 더한 정적에 빠진다. 다음타자, 그다음타자... 마지막 4번 타자인 부장님까지 별소득이 없자 CD님은 모자를벗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들숨 날숨을 크게 쉰다. 아마 프로젝트내내 꺼지지 않을 한숨의 시작. 그럼 우리는 서둘러 잡았던 저녁약속을 취소하고, 주말의 계획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나는 그 한숨을 참 싫어했었다. 무섭기도 하고, 짜증도 났다. 가장 시끄럽고 밝아야 할 회의실이 가장 조용하고, 어두웠으니까. 우리도 다 힘든데, 혼자만 힘든가?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빠져나온 지금에야 생각한다. CD라는 직업은 한숨이 나오도록 참 무거운 직업이라고. 어쩌면 그건 살기 위한 심호흡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한숨>이라는 노래가 있다. 故종현이 작사한 그 곡엔 이런 가사가 등장한다.
‘누군가의 한숨, 그 무거운 숨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
맞는 말이다. 나에게 다른 이의 힘듦을 재단할 권리는없다. 이제는 사람은 누구나 나름으로 힘들다는 것도, 그래서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든 표출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힘들다는 말 대신 가장 만만한 엄마에게 독한 말을 내뱉곤 했었으니까. 참 못난방법이었다. 대신에, 이제 나는 한숨을 쉬어볼까 한다. 나쁜 말과 못난 행동으로 기분을 환기시키기보다, 선선한 밤 혼자서 크게 내쉬는 한숨이 더 낫지 않을까? 내가 내뿜은 나쁜 이산화탄소는 고마운 가로수들이 공기로 바꿔줄테니 말이다.
Written by. 前 카피라이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