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영웅, 앨런 튜링

세상을 구했지만 사회에 버림받은 천재

by 두드림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도 모순적일 수 있을까. 앨런 튜링의 생애를 바라보면, 우리는 한 천재의 위대함과 사회의 잔혹함이 어떻게 한 몸 안에서 충돌하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분명히 인류를 구한 영웅이었지만, 정작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그를 범죄자로 매장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단순한 과학사의 기록을 넘어, 인간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튜링은 수학자로서 계산의 본질을 탐구했고,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을 세상에 던졌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단순한 기술적 질문이 아니라, 인간 지성과 존재의 경계를 흔드는 철학적 도발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남긴 질문은 기계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지만, 정작 그의 삶을 무너뜨린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 사회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 튜링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 독일군의 암호 체계 에니그마는 그 시대의 눈으로는 풀 수 없는 미궁이었다. 하지만 그는 ‘봄베’라는 기계를 설계하여 암호를 해독했고, 그 결과 전쟁은 단축되었으며 수백만의 생명이 구원되었다. 인간 이성이 만들어낸 장치는 죽음을 삶으로 바꿔냈다. 그러나 정작 그 장치를 만든 사람은 사회로부터 삶을 박탈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비밀이 벗겨졌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감사와 명예가 아니라 낙인과 고립이었다. 그의 성적 정체성은 범죄로 간주되었고, 화학적 거세라는 비인간적 처벌이 그를 기다렸다. 과학이 인류의 가능성을 넓히고 있었던 바로 그 시기에, 사회는 한 인간을 가장 원시적인 방식으로 짓눌렀다. 진보와 야만이 동시에 존재하는 아이러니, 그것이 튜링의 운명이었다.


그는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젊은 나이의 죽음은 그가 짊어진 고통의 무게를 가늠케 한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사회가 자신이 낳은 영웅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되묻는다. 우리는 과연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튜링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다름을 범죄로 낙인찍고, 기여를 외면하며, 편견으로 한 존재를 고립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뒤늦게 영국은 사과했고, 튜링의 이름을 명예롭게 복권시켰다. 그러나 그 모든 회복은 그의 죽음 이후였다. 살아 있을 때는 고통을 주고, 죽은 뒤에야 영웅으로 칭송하는 이 사회의 역설은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정의란 언제, 어디서 실현되어야 하는가. 인간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란 말뿐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는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바로 이 모순을 스크린 위에 옮겨 놓는다. 영화는 한 천재의 고독과 투쟁, 그리고 불행한 결말을 담담하게 보여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에게 박수칠 수 없는 시대의 어둠을 직면하게 만든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단지 과거의 비극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질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불행한 영웅’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튜링은 불행했으나, 그의 불행은 우리에게 사색을 요구한다. 과학은 인간을 구할 수 있지만, 사회가 인간을 파괴할 수도 있다. 진보는 지식에서 나오지만, 인간다움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나온다. 튜링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


https://www.netflix.com/kr/title/70295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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