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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luck Sep 26. 2020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이야기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 저, 홍신문화사)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니. 자유는 좋은 것이라고 알고 있고, 우리는 어느정도 자유를 누리면서 산다고 생각하고 있고, 자유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란다. 사람들이 자유로부터 왜 도망치려고 하는건가.
 
사실 이 책은 프롬이 나치의 파시즘(프롬은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나치즘을 묶어서 파시즘이라고 표현했다)이 독일을 전쟁의 광기로 몰아넣은 이유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놓은 책이다. 파시즘은 히틀러 개인의 정치색이 사회적인 요소들과 결합해서 탄생했다기 보다는 히틀러가 제시한 정치적 선전요소들이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했던 그당시 독일 국민들 - 특히 중하층 노동자층 - 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켜 번졌다는 논지다.
 
그렇다면 자유로부터 왜 도피하려고 하는가. 프롬은 말한다. 인류가 자유를 얻기위해 수백년간 노력을 해 온 것은 사실이고 그 덕분에 사회적으로나 정치적 등 여러분야에서 개인들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중세시대 이전, 즉 길드나 봉건영주의 장원제에 속해서 일신의 자유가 없었던 시절에는 자유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한 개인이 속한 사회가 어느정도 생활과 정서적 안정을 보장해주었던 면이 있고 - 속한 조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 그로 인해 자유는 얻지 못했을 망정 심리적인 안정은 얻을 수 있었다고.
 
그러나 이후 시민사회의 투쟁의 결과로 자유라는 열매는 얻어내는데 성공했으나 그이전 중세적 질서에서 가졌던 안정감 - 1차적 관계의 상실 - 이 사라지게 된다. 개인의 자유란 결국 개인 1인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자유를 뜻하는데 막상 그것이 주어지게되면 개인으로서는 홀로 뚝 떨어져버리는듯한 느낌에 불안감과 고독감에 휩싸이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유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대상으로 사도마조히즘을 바탕으로 하는 2차적 관계설정인 권위주의에 빠지거나, 파괴적인 성향을 띄거나 이것저것 다 자포자기에 이르러 체제에 순응하게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상황이 겹쳐졌다. 다 알다시피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36년간을 지내다가 온갖 독립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다. 일본이 핵폭탄 두 방 맞고 무조건 항복한 댓가로 그냥 독립국의 지위가 주어졌더랬다. 그 이후도 찬반논리에 온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하에서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제대로 된 국민의 권리와 헌법정신을 배우기도 전에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뽑았으며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한반도는 쑥대밭이 되었다가 박정희를 대표로하는 군사독재가 시작되었으며 그나마 독재자는 암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래도 열심히들 국민들이 살아준 덕분에 아시아권에서는 민주주의가 자리잡는데는 성공했다.
 
조선시대 자체는 자유를 얻고자 하는 즉 서양에서 말하는 시민혁명스러운 움직임은 없었다. 근대화의 맹아도 없었고. 그런 상태에서 일본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가 갑자기 준비도 없이 독립국의 지위에서 자유라는 선물을 받았기는 했지만, 그걸 제대로 연구해보고 느껴보고 적용해본 국민이 없었으니 실로 자유에 대한 개념 자체가 그당시 우리에게는 없었다. 무언가 자유로운 움직은 군부독재자들로 인해서 번번히 좌절되기 일쑤였고 경제발전이 최우선이라는 논리에 밀려서 자유라는 고결한 사상은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저 "내 맘대로 구애받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다보니 정치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진 80년대 이후 국민들의 자유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그와 거의 동일한 시점에 프롬이 말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과정이 일어난 것이다. 이제 좀 먹고 살만해졌더니 자유라는 것이 나한테 있단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오로지 암기식 교육이라 그게 뭔지에 대해서, 서양에서는 그 개념을 정착시키는데 수백년이 걸린 깊은 개념이라는 걸 배우지도 못했다.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런데 불안하다. 빈부격차는 심해지기 시작하고, 남의 집 아이들은 사교육에 열심인데 우리 애들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다. 불안하다. 다른 사람은 서울에 아파트를 사서 마구 올라간다고 좋아하고 주식이 올라서 돈 벌었다고 하고 좋은 차에 비싼 음식 먹고 다니는 걸 보니 불안하다. 결국에는 나도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되서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불안하다. 이대로 살다가는 거지되기 십상이겠다. 이런 마음들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왜 궁극적으로 필요한지도 고민해보지도 않은 채로 남이 하는대로 그대로 따라한다. 아이들조차도 같은 점퍼 따라입기를 더 좋아한다. 아이들도 고립감이나 불안감이 있는 것이다. 자유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개성은 전혀 안중에도 없어진다. 인간을 됨됨이로 평가하기보다는 "스펙"으로만 평가함에 주저함이 없다. 프롬이 그토록 걱정하던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라이브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프롬은 마지막 장에서 사랑이 최고의 해결책이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해결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이해가 된다. 이렇게 엉망인 세상에서 무슨 어떤 방법이 해결책이 되어줄 것인지 프롬으로써도 속으로는 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프롬이 제일 걱정한 것은 파시즘이 언제라도 굳이 정치적인 파시즘이 아니더라도 대중들의 불안감이나 고독감을 자극하기만 한다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현재같이 우리나라가 혼란한 상황이고 국민들이 거의 모두 고독감과 소외감과 불안감에 휩싸여 값진 인생을 살지 못하는 이 때 어떤 식이고도 이를 이용한 파시즘은 조만간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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