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어가 만들어지는 과정
프리덤,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야나부 아키라 저, AK)
우리는 흔히 번역이라고 하면, 해당 외국어에 학위가 있거나 유학을 갔다왔거나 아니면 독학으로라도 외국어를 열심히 습득하신 분들이 우리말로 바꿔서 내놓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하고는 한다. 그러나 한 번만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번역이라는 것은 외국의 것을 우리말로 단순히 바꾸는 차원이 아니라 외국어로 된 텍스트를 놓고 우리말로 다시 창작을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에게는 없던 단어를 문맥에 맞게 그리고 우리말로 했을 때 어색함이 없게 매끄럽게 번역을 한다는 것. 제2의 창작에 다름 아닐 것이다.
본 작품은 일본의 개화기 당시에 서양의 문물이 밀려들어오면서 서양언어로 된 텍스트를 일본어로 번역하게 되고, 해당 번역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당대의 지식인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일본어로 자리잡았는지를 「사회」, 「개인」, 「근대」, 「미」, 「연애」, 「존재」, 「자연」, 「권리」, 「자유」, 「그, 그녀」, 이 10가지 번역어를 통해 연구한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본 작품 내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상기 10가지 단어 거의 모두 다 "카세트효과"에 의해 해당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그 단어의 의미가 늘어남에 따라 번역어로 자리잡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카세트 효과란 작가가 독창적으로 사용한 개념으로 카세트는 모양이 아름다운 보석상자를 뜻하는데,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몰라도 뭔가 좋은 것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으로, 기존에 없었던 단어가 외국에서 들어오면 그 번역어가 실제 그 외국어를 정확히 표현하는가는 상관없이 카세트 효과로 인해 좋게 느껴져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로 된 단어들이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라고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위의 10개의 단어도 일본이 번역한 단어라는 것에서 일단 살짝 충격을 받았다. 그만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이 된 것이다. 작가는 일본의 경우 번역어들이 일상어를 이용해 번역한 것이 아니므로 일본인의 일상어로서는 일반인들에게 거리감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위 단어들이 일상생활에서 충분히 일상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걸 본다. 일본의 경우 서양의 단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관련 지식인들의 고뇌와 노력이 있었고, 번역어로 정착하기까지 지난한 과정들이 있었지만, 우리의 경우 일본에 의해 개항이 된 이후 그들의 번역어를 그냥 그대로 별다른 고민이나 수정없이 일상어로 받아들인 탓이다.
그 중 몇가지 인상적인 내용에 대해서 적어보면,
1. 근대 : 본래 일본에서는 근대와 근세가 같이 사용되다가 근대라는 단어가 현재까지 남은 것이라고 한다. 서양과 일본의 근대의 의미는 당연히 달랐으므로 근세냐 근대냐라는 말을 어느 것을 쓸지도 다툼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마저도 근대라는 단어의 명확한 의미를 확립하지 못한채로 사용해 온 것이 현재까지 번역어로서 굳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이 일본에 의한 것이냐 아니냐에 의견들이 갈리고 있는 상황인데, 잘 생각해보면, "근대"라는 번역어의 정의조차 제대로 성립해 놓지 못한 상황에서 근대라는 시대구분을 하겠다는게 어찌보면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 권리 : right. 서양에서는 로마시대부터 유래한 자연법과 자연권 사상이 있었다. 그런 개념이 없었던 아시아 3국 - 한, 중, 일 - 으로써는 신분제를 뒤집어버릴 만한 개념인 권리라는 건 상상조차 못한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일본에서는 서양에서 권리의 본래 의미보다는 "힘"이라는 의미에 더 무게가 실려서 번역이 된 말이 권리라는 것이다. 우리도 사실 그렇지 않은가. "초상권","기본권","요구권" 등등 타자에 대한 나의 배타적인 힘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3. 자유 : freedom, liverty.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 자유라는 개념이 방종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개화기에 이 단어가 들어오면서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지식인들도 이 단어들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방종에 가까운 단어인 걸로 생각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자유에 대한 개념이 일반 대중으로 퍼져나가면서 한동안은 자유와 방종의 개념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럴만도 하다. 갑자기 신분제가 폐지되고 이제 모두 자유롭다라고 해 버리면 다들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 없었을거다. "아니 내가 이제 자유로운데,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것 아닌가?"
4. 그, 그녀 : he, she. 작가는 "일본어 문장에 불필요한 말로 침입했다"고 주장한다. "서양에서는 단순히 지시대명사에 불과한데, 일본에서는 지시대명사도 아니고 3인칭도 아니고 한정된 특정인물을 가리켜 대명사적이면서도 명사적이게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동안 국내작품과 번역작품을 많이 읽어보았지만, 국내작품도 보면 그, 그녀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본다. 사실 한국어에서 3인칭 지시대명사는 그리 용도가 크지 않은 것 같다. 그 대상을 다시 반복해서 말해주면 되는 것이지 말이다.
한창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르웨이의 숲"으로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었을 때 그당시 데뷔한 국내 작가들은 하나같이 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면서 하루키의 작법을 그대로 모방했었다. 현재는 만화가들이 일본만화의 작법 - 스토리텔링이나 화면 구성, 등장인물의 행동 등 - 을 모방하고 있다. 유행을 따른다는 것은 비난할 일은 아니다. 표절이 아니라고만 한다면. 그러나 이 책에서 보듯이 일본이 고심해서 번역한 번역어들을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인 필터로 걸러서 흡수하지 않고, "빨리빨리" 받아들이기만 급급했다. 그렇다보니 자연히 서양에서 들어온 개념들은 또 다시 왜곡되고 그들의 철학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번역어가 일상어가 되다보니 그걸 사용하는 국민들의 사상마저 은연중에 왜곡되고 만다. 그런 과정에서 생각해 보면 일련의 하루키 따라하기나 일본만화 작법 따라하기가 이해가 되기는 한다. 우리만의 것을 만들 시간이 옛날부터 없었으니까 말이다.
어릴 때부터 영어 가르치는데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뛰어난 번역가를 양성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언제까지 일본이 만들어 놓은 걸 그냥 떠 먹고 살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