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패배자들
위대한 패배자(볼프 슈나이더 저, 을유문화사)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순위 경쟁에 익숙하다. 지금은 아니지만 국민학생 때부터 석차를 가리는 시험에 익숙하고, 중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대학교를 가기 위한 순위 경쟁에 익숙하고, 대학교에서는 취업을 위한 경쟁에 익숙하고, 취업 등을 비롯한 사회인이 되면서부터는 돈을 많이 벌어서 잘 살기 위한 경쟁에 익숙하다. 그저 당연한 것이다. 순위권에서 밀려나버리면 그 순위에 다시 도달하기도 거의 불가능하고, 사람들을 그저 목적이 아닌 경쟁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는데 더 익숙하다.
볼프 슈나이더는 우리가 흔히 "2인자" 또는 "패배자"로 알고 있는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문학권력 괴테에 밀려버린 천재 렌츠, 20대에 이미 완성되었지만 세 편의 작품만 남기고 요절한 뷔히너, 어이없이 스탈린 권력에 희생된 작가 바벨, 혁명의 대표 아이콘 체 게바라, 동생 토마스 만의 그늘에 가려져 힘들게 살았던 작가 하인리히 만, 메리 스튜어드, 루이 16세, 오스카 와일드 등등 시대와의 불화로 비참하게 죽었거나, 경쟁의 흐름에 맞춰서 발 빠르게 움직이지 못해 잊혔거나 하는 인물들 말이다.
슈나이더는 승리자라고 해서 도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경쟁자들을 떨궈내 버리기 위해서 갖은 술수에 능한 자들이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패배자라고 해서 승리자보다 도덕적으로나 실력으로나 밀려서 패배자가 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승리자에 비해서 술수에 능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또 하나. 우리가 경외해마지않는 노벨상. 각 분야의 발전에 기여한 자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상. 그러나 저자의 의견에 따르면 노벨상 수상자 선정절차가 절대 공정할 수만은 없다고 한다. 수상 후보자를 선정하는 과정이 문제인데 갈수록 분야들이 고도로 전문화가 되어가는 탓에 해당분야 전문가들도 성과를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과학연구분야의 경우 혼자서 장기간의 연구를 수행하는 경우도 거의 없는 실정이라 수상대상 연구에 참여한 사람 중 누구에게 상을 줄 것인지도 문제라고 한다. 특화된 전문분야는 아는 사람만 아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를 가려내는데 기존의 수상자들에게 조언을 받을 수밖에 없단다. 그래서 유독 과학분야 수상자의 경우 기존 수상자들의 제자나 영향력 아래 있는 자들이 많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떤가. 위에서 말했다시피 어릴 때부터 경쟁하기에 익숙해져서 1등이 아니면, 명문대에 진학한 것이 아니면 낙오된 사람 취급을 한다. 모든 사람이 승리자가 될 수도 없음에도 다들 1등이 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머릿속에 깊이 새겨버렸지 않은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공부 잘해서 명문대학을 나와 의사, 판사가 되는 게 다가 아닌데도 말이다. 우리가 이른바 "패배자"의 삶을 공부하는 건 그들을 위로하거나, 그들로부터 패배하게 된 원인을 찾아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준비하거나, 패배자가 있었으니 나의 "패배"도 수긍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인생에 있어서 이길 수 - 솔직히 누구를 상대로 뭘 얼마나 이긴다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 도 질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살아가는 방식은 수천수만 가지이므로 단편적인 인생관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것, 승리자의 삶이라고 해서 도덕적이고 추앙받을만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하계올림픽이 열리지 못했다. 늘 올림픽 같은 국가 대항전 운동 경기에서는 1등, 금메달을 목에 피가 올라오도록 강조한다. 서양 선수들은 동메달을 따도 기뻐하는데 우리나라 선수들은 은메달에도 분하다며 눈물을 흘린다. 아마 올림픽이 예정대로 열렸었더라면, 금메달을 외쳐대는 아나운서와 해설자들의 쇳소리 나는 목소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울려 퍼졌을 테고, 금메달로 인해서 국격이 상승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반짝 늘어났을 것이다. 그나마 1등을 향한 허망한 외침을 듣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