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마르크는 선한 사람이었나 보다
개선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민음사)
"서부전선 이상 없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통해서 영웅적인 전쟁 서사가 아닌 지극히 보통사람들의 위치에서 바라본 전쟁을 담담하게 그려냈던 레마르크. 본작을 통해서는 2차 대전 발발이 임박한, 독일의 선전포고를 앞두고 있는 프랑스를 배경으로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탈출한 주인공 라비크와 다른 망명객들이 겪는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은 독일에서 망명한 외과의사로 파리에서 파리의 의사들의 수술을 대신해주면서 살아가고 있다. 우연히 다른 망명객 "조앙 마두"를 길거리에서 만나게 된 후 역시나 갈 곳 없는 신세인 망명객 처지에 감회 되어 결국에는 서로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따뜻한 그 무엇 외에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더 이상 무엇이 있단 말인가?" (1권 41페이지) : 망명객 처지에서는 그 어느 상황도 안정적이지 않다. 줄 수 있는 것도 없다. 당장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그 누구를 위해서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아무 의미도 없게 되어버린 단순한 습관으로 이렇게 옷을 차려입은 것을 보니 라비크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1권 98페이지)" : 조앙 마두 또한 망명객의 처지에서 객지로, 다른 나라로 돌며 고생을 겪다 보니 생에 대한 의지도 없고, 의미도 없는 생을 그저 살아갈 뿐이었다. 그러다가 서로 사랑에 빠진다. 비슷한 처지에 감화된 것이겠다. 그러나 사랑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불안한 처지.
"그는 잔을 끝까지 비우고서 여자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갑자기 하나의 밝고 신비 가득한 얼굴로 보였다. 환하게 드러난 신비였다... 전에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을 때니까."(1권 171페이지)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과 조앙 마두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다른 러시아에서 온 망명객인 모로소프와 주인공 사이의 우정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이 집 삼아 살고 있는 호텔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망명객들의 삶 - 각국에서 망명한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 을 보여주고 있다. 톨스토이의 웅장하고 귀족적인 영웅적인 전쟁의 모습이나 일반적인 전쟁영화에서 보여주는 참혹한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는 전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망명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감 없이 그리고 따뜻하고 연민 어린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망명객 처지이므로 언제든지 파리 경찰에 잡혀서 국외로 추방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주인공은 늘 고민한다. 연인 조앙 마두는 현재에 충실한 사람으로 "다르게 살고 싶어 했으며" 주인공과 더 사랑을 하고자 하지만 주인공은 그럴 수가 없다. 피차 불안한 상황이니까. 그래서 연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사랑한다 하더라도 포기할 생각을 늘 하면서도 사랑하고 싶어서 늘 고뇌한다. 그래서 이런 결심을 하기도 한다. "사람이란 자기 속에서 자라나지 않는 것이라면 결코 오래도록 지니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야." (2권 187페이지)
소설 후반부에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그러나 레마르크는 비극으로 끝내지는 않으려고 했다. 주인공은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주인공처럼 끝까지 인간의 용기와 존엄은 잃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전쟁영웅도 아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정치가도 아닌 보통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함에 있어서 레마르크는 정말 탁월한 작가다. 전쟁이란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재앙이기는 하지만, 레마르크의 작품을 읽으면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결국 보통의 우리같이 느껴지고 내가 실생활에서 전쟁을 겪는다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역자의 말대로 "불안과 절망, 고통의 한가운데서야말로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사랑과 우정, 평범한 삶의 순간순간임을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