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둘째 아이가 직접 만든 예쁜 초대장을 건네주었다. 정성스레 색칠한 나비가 돋보이는 초대장에는 전통춤 무도회에 초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동안 갈고닦은 프랑스 전통춤 실력을 아빠 엄마 앞에서 선보이는 행사였다. 학교에서 정해준 드레스 코드대로 흰색 상의와 파란색 하의를 멋스럽게 갖춰 입은 아이와 함께 우리 부부는 과연 아이가 어떻게 프랑스 전통춤을 소화했을까 기대로 한껏 부푼 마음을 안고 학교에 도착했다.
햇살이 가득한 학교 실외 운동장에는 먼저 도착한 학부모들과 드레스 코드에 충실한 학생들이 흰 물결을 이루며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둘째 아이는 자기 반 친한 친구들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냅다 뛰어가 버렸고, 우리는 낯익은 학부모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학년별로 초록, 빨강, 노랑, 주황의 스카프를 맨 아이들이 둥그렇게 같은 반 친구들의 손을 잡고 신나면서도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준비 자세를 취했다.
모든 학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카메라에 제일 잘 담을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는 미소를 머금은 들뜬 표정으로 아이들을 주시했다. 출근 시간에 진행하는 행사였음에도 학부모들의 참석률이 꽤 높았다. 아빠, 엄마가 모두 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만큼 오늘 행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거 같았다.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 베이스 소리에 플루트? 오보에? 피리? 같은 악기가 연주되는 흥겨운 프랑스 전통 음악이 흐르니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례대로 앞에 있는 친구의 어깨를 터치하고서는 손에 손을 잡고 긴 줄을 만들면서 실타래처럼 구불구불 흥겹게 운동장을 돌아다녔다. 동그랗게 돌다가 박자에 맞추어 일제히 발을 쿵쾅거리기도 하고, 또다시 돌다가 제자리에 멈추어 손뼉을 동시에 치거나, 양손을 들고 흔들며 제자리에서 도는 등의 율동을 하였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서로 눈을 맞추며 즐겁게 동작을 맞췄다. 어떤 전통 노래에서는 큰 동그라미 그룹에서 점점 작은 동그라미 그룹을 만들어 가며 율동하다가 나중에 두 명씩 짝을 지어 파트너와 손을 잡고 빙빙 돌거나 손뼉을 마주치며 음악에 맞춰 춤추기도 하였다. 어떤 춤은 반별로 손을 잡고 큰 원을 만들었다가 중간으로 모였다 다시 큰 원을 만들고선 노래의 가사에 맞춰 머리를 흔들고, 손을 흔들고, 다리를 흔들고, 엉덩이를 흔들며 춤췄다. 아이들은 엉덩이를 씰룩씰룩 흔들 때마다 서로를 쳐다보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총 7개의 다른 노래와 춤을 준비했고 모든 음악은 하나같이 통통 튀는 밝고 신명 나는 곡이었다. 한 곡당 3~4분 정도의 길이였는데 아이들은 지치지 않고 신나게 율동했고, 노래와 안무가 재밌고 단순해서인지 아이의 학년에서는 중간에 헤매는 아이들도 드물었다. 둘째 아이의 파트너는 지난번 생일잔치에 초대받았던 이즈라는 여자친구였다. 둘째 아이와 이즈는 호흡이 척척 잘 맞았고, 이 둘의 환상적인 춤사위를 보며 이즈 엄마와 나는 기특해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아이들이 귀엽다고 서로 호들갑을 떨어댔다.
마지막 곡은 아이들이 선보인 율동을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거였는데, 둘째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운동장 정중앙으로 갔다. 곡의 내용을 알아들어야 곡에서 지시하는 대로 율동할 텐데 자유롭게 몸을 흔들어 대는 다른 학부모들보다 자꾸 한 템포 늦는 나를 보며 둘째 아이는 재밌다고 웃었고, 가뜩이나 몸치인 난 어색해서 웃었다. 눈치를 보는 나와 다르게 프랑스 학부모들은 역시나 남의 시선 따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춤을 잘 추면 잘 추는 대로, 못 추면 못 추는 대로 자신의 아이와 순간을 즐기는 듯 보였다. 운동장에서 단체로 진행한 모든 무도회 순서가 끝나고 이번엔 아이들의 교실로 각자 흩어져 들어갔다.
둘째 아이의 교실에는 아이들이 전날 만들었다는 케이크와 함께 음료와 다과가 세팅돼 있었다. 그리고 반으로 모인 아이들의 마지막 공연이 준비돼 있었다. 아이들은 그동안 배운 노래 두 곡을 연달아 합창했다. 열심히 노래 부르는 아이, 입을 꾹 다문 채 멀뚱멀뚱 쳐다보는 아이, 딴짓하는 아이, 하품하는 아이, 옆 친구와 장난치는 아이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아이들은 제법 한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한편에 먹음직스럽게 놓여있는 달콤한 빵의 유혹도 있을 것이고, 긴 무도회에 지쳤을 법도 한데 준비한 모든 순서를 부모님 앞에서 끝까지 해내는 모습이 기특했다. 그런 아이들을 향해 학부모들은 힘찬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공연이 다 끝난 후 둘째 아이는 우리 손을 이끌고 교실 곳곳을 다니며 나비도 보여주고, 자신의 미술 작품들도 보여주느라 바빴다. 평소 엄마, 아빠와 떨어져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 공간에서 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마구 누비며 다녔다.
불과 7~8개월 전인 작년에만 하더라도 프랑스 유치원에 적응하느라 아이가 얼마나 힘겨워했던가. 하루 종일 무표정의 굳은 얼굴로 낯선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이 교실에서 불편하게 앉아있었을 그 당시 아이의 모습과 지금 저렇게 편안한 얼굴로 교실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 교차하며 순간 콧등이 시큰해져 이를 꽉 깨물었다. 그 시기는 정말 아이들에게도 우리 부부에게도 쉽지 않았던 나날이었다.
지난 현장학습 때 통역을 해주었던 미국인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귀여운 에피소드를 들었다. 딸 루시와 함께 길거리를 지나가다 루시가 한국 국기를 발견하고는 “아빠, 저건 한국 국기에요. 저기가 **의 나라에요. **은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국기가 걸려 있던 곳은 바로 한국문화원이었고, 덕분에 딸과 함께 한국문화원을 구경하며 루시의 아빠도 한국에 관해 공부했다고 한다.
아이의 반에는 한국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영어, 스페인어, 베트남어가 모국어인 학생들이 있다. 그래서 이런 친구들이 자신의 언어와 나라를 소개하는 시간도 있었다. 둘째 아이는 친구들 앞에 나가 한국어로 숫자를 5까지 세는 걸 가르쳐 주며 뿌듯해했다는 이야기를 담임선생님에게 전해 들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아이는 종종 내가 써준 엄마, 아빠, 한국, 서울 같은 낱말을 들고 반 친구들에게 한글을 알려주기도 했다. 작년 어느 날에는 담임선생님이 둘째 아이 덕분에 파리에 소재한 코리안 레스토랑에 처음으로 다녀왔다며 김치 이야기를 한참 했던 적도 있었다. 프랑스 문화만 강조하며 이방인 아이가 하루빨리 자신들의 문화에 흡수되도록 강요하는 게 아니라 타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과 존중하는 태도를 갖고 아이를 바라봐 주는 선생님들이 고마웠다. 이런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반 친구들 역시 한국이라는 나라를 정확히 알고 있고, 둘째 아이의 다른 배경과 프랑스어를 배우는 힘겨운 과정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둘째 아이를 무진장 좋아하는 몇몇 활발하고 수다스러운 친구들은 늘 아이 곁에서 도와주려 애쓰는 모습을 본다. 실제로 그 친구들과 어울리며 둘째 아이의 프랑스어가 상당히 늘었다.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전통춤 무도회는 특별했다.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한마음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춤을 추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쉬운 춤 동작이라 억지스러운 강행 연습도 없었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연출된 행사였기에 더없이 좋았다.
이제 유치원 행사는 일 년을 마무리하는 피날레 파티 하나만 남겨 두고 있다. 그리고 올 9월에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다. 한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아이들을 키우며 보내는 시간은 야속하게도 참 빠르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