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말 파티가 6월 마지막 주에 아이들의 두 학교에서 진행됐다. 목요일 저녁에는 첫째 아이의 영어 합창, 금요일 저녁에는 둘째 아이의 유치원 파티, 토요일 오전에는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파티, 오후에는 첫째 아이 친구 생일 파티가 연달아 있었다. 7~8월에 태어난 친구들이 긴 여름방학을 앞두고 앞당겨 생일 파티를 하다 보니 학교 행사와 더불어 우리 부부는 유난히도 바쁘고 고단한 6월을 보냈다. 게다가 더운 날씨 탓에 생일 파티를 죄다 집이 아닌 몽수리, 뤽상부르 공원에서 하는 바람에 몇 배로 더 지치기도 했다. 한낮 무더위에 드넓은 공원을 헤매며 파티 장소를 찾아 아이를 데려다주고 근처에서 몇 시간을 보내다 파티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둘째 아이의 유치원 학년말 파티의 테마는 학부모위원회에서 ‘여름 바다’로 정했다. 학교 복도와 실외 운동장 곳곳에 시원한 바다 그림과 파도를 연상케 하는 물결무늬 색종이와 튜브와 비치볼 같은 소품이 어우러져 그럴싸한 여름 바다의 분위기가 연출됐다. 먹거리와 즐길 거리를 위한 1유로 티켓을 10장 구매하고, 2유로 추첨 티켓(Tombola)을 5장 구매했다. 학부모들은 저마다 다양한 과자, 음료수, 케이크, 피자 등을 준비해 왔다. 다과를 한창 세팅 중인 학부모 위원회에게 집에서 가져온 주스와 감자칩을 전달하고는 본격적으로 파티에 참여했다.
아이들에게는 티켓을 나눠 주고 각자 알아서 활용하게끔 하였다. 아이들은 심사숙고하며 하와이 꽃목걸이와 젤리를 티켓과 교환하고는 페이스 페인팅, 장난감 물고기 게임, 테니스 등 학부모위원회에서 준비한 프로그램을 즐겼다. 추첨 티켓은 모두 꽝이 나와 풍선과 장난감 메달만 받게 되었다. 티켓으로 얻은 수익금은 파티 비용으로 일부 사용된 후 전부 학교에 기부된다고 한다. 학부모위원회의 적극적인 헌신과 봉사 그리고 여러 학부모의 재능기부로 준비된 행사라 대부분 수익금이 학교 발전에 사용될 테다.
첫째 아이는 같은 반 친구 나임을 만나 주로 테니스 활동에 참여하며 함께 어울려 놀았다. 둘째 아이는 친구들과 물총놀이를 하며 온몸이 홀딱 젖은 채로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우리도 학부모들을 위해 준비된 딸기 칵테일을 마시며 평소에 바빠 인사와 안부만 겨우 주고받던 학부모들이나 선생님들과 교제를 시작하였다. 학부모 간 네트워크는 바로 이런 캐주얼한 분위기의 파티를 통해 형성된다. 지난번 크리스마스 파티는 나임과 왈리드 엄마 아빠와 친해진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아이들끼리 나이도 똑같고 서로 친하니 자연스레 통성명하고 직업을 묻고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친해질 수 있었다. 그 후 서로에게 믿음이 생겨 간혹 하교 시간에 늦을 때면 서로의 아이를 돌봐주는 사이가 되었다.
이번 파티에는 둘째 아이의 베스트 프렌드인 시몽이 엄마 소피와도 오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시몽이는 소피의 막내아들이다. 9살 딸과, 12살 사춘기 아들까지 둔 소피는 세 남매의 엄마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크하다. 늘씬한 몸매에 새하얀 피부, 초록빛이 도는 헤이즐넛 색의 눈과 진한 갈색 단발머리의 그녀는 이지적인 이미지와 세련된 스타일로 누가 봐도 전형적인 파리지엔느인데 파리에 온 지 2년도 채 안 됐단다. 둘째 아이 옆에 늘 붙어 쉴 새 없이 조잘거리며 눈만 마주쳐도 서로 좋다고 웃는 시몽이 덕분에 둘째 아이의 프랑스어가 많이 늘었다는 내 말에 소피는 이런 얘기를 했다. 시몽이 가족은 아프리카 근처에 위치한 천정 자연이 아름다운 프랑스령 섬 레위니옹(Réunion)에서 살다가 파리로 왔는데 시몽이도 파리에 와서 새로운 환경과 학교에 적응해야 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이사와 전학을 경험한 시몽이가 둘째 아이를 이해할 수 있어 친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각자가 느끼는 파리에 대한 단상을 이야기하며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주고받았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들은 짝지를 늘 궁금해한다. 루마리아나 아빠 아넷은 미국 힙합 그룹을 홍보하는 일과 패션 회사를 운영하는 전직 래퍼 흑인이다. 수시로 뉴욕과 도쿄와 파리를 오가며 문화와 패션 관련 일을 활발히 추진하는 성공한 사업가다. 조만간 서울에도 진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화려한 힙합 의상을 깔끔히 갖춰 입은 그는 짝지에게 다가와 명함을 주고는 자신의 패션과 음악 사업을 발표하듯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신이 난 나는 짝지를 대변하며 우리 짝지도 힙합과 패션에 관심이 많고 작곡도 할 예정이라고 하니 그는 소니나 유니버설 레코드사에 지인이 있다며 곡 작업이 완성되면 알려달라는 제의도 하였다.
사람을 쉽게 잘 믿고, 진실과 거짓을 구별 못 하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나에 대한 모든 카드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아주 사소한 가능성에도 큰 희망을 발견하는 나와 달리 나의 짝지는 의심이 많고, 아무리 친해져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매사에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이다. 아넷의 제안에 흥분해 있는 나와 다르게 짝지는 차분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가 여태껏 만나온 아넷 같은 성향의 수많은 사람을 떠올리며 아넷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리고 짝지는 그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도 금세 김이 새고 말았지만 이런 우리의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이 균형을 이루며 서로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자극을 주니 그런 짝지의 성격을 나무랄 수가 없다. 하지만 연애와 신혼 때는 이런 다름 때문에 서로 네가 틀렸다며 얼마나 으르렁대고 싸웠는지.
그리고 이날 우리에게는 어려운 마음으로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파티 전날 둘째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다. 둘째 아이를 포함한 남자아이 네 명이 교실의 구석에서 같은 반 여자아이에게 바지를 벗으라고 한 사건이 있었다. 여자아이는 바지와 팬티를 벗었고 남자아이들 중 한 명이 선생님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단다. 그걸 지켜본 다른 여자아이가 자신의 아빠에게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고, 그 아이와 아빠가 그다음 날 선생님에게 말한 것이다. 선생님은 네 명의 남자아이 학부모와 차례대로 상담했고 마지막 타자가 나였다.
아이의 반에는 음악을 듣거나 그림책 이야기를 들으며 오후에 30분 정도 휴식을 취하는 릴렉싱 시간이 있다. 선생님은 그 시간이 끝나고 정리하는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자신이 그 상황을 놓쳐 정말 속상하다고 말했다.
난 멘붕이 왔다. 네 몸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몸도 소중하다는 교육을 안 했던 것도 아니고, 첫째 아이를 겪으며 그 시기에 이성의 몸이 궁금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사진이나 그림으로 여성과 남성의 몸 차이를 충분히 설명해 줬다고 생각했다. 첫째 아이도 한국 어린이집에 다녔던 6살 때 여자 친구들이 화장실에 가면 보고 싶어 진다고 말했었다. 그때도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며 다른 사람의 몸은 소중해서 몰래 보면 안 되는 거라고 가르치는 동시에 궁금하고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었다. 여자 몸이 보고 싶을 때는 엄마에게 말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마다 어린이용 성교육 동영상을 찾아 남자와 여자는 다 같지만 생식기와 가슴만 다르게 생겼다는 걸 영상으로 보여줬다. 점차 첫째 아이의 호기심은 사그라들었고 어느새 다른 이의 몸을 몰래 보는 건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옳지 않은 행위임을 인식했다.
둘째 아이의 프랑스 담임 선생님도 그 사건 이후 아이들에게 모든 사람의 몸은 소중하고 다른 사람의 몸을 함부로 보여달라거나 만지는 것도 안 되고, 내 몸도 소중하니 부모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절대 보여주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내가 다른 문화에서 왔고, 이 사안을 영어로 설명해야 해서 어떻게 꺼내야 할지 어려웠다고 말했다. 나는 그건 어떤 문화에서든지 허용될 수 없는 일이고 명명백백히 내 아이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아이를 잘 교육하겠다고 사과를 한 후, 그 여자아이의 부모님에 관해 물었다. 그 아이의 아빠는 아직도 화가 많이 나 있고, 엄마는 선생님과 상담 후, 그 또래 남자아이들은 아직 어리기에 어른들이 생각하는 거처럼 나쁜 의도에서 한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고는 진정이 됐다고 했다. 선생님은 나와 상담 후 잘 이해해 줘서 고맙다고 했고 난 미안함과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둘째 아이는 이미 자기 잘못을 알고 있었다. 남에게 바지를 벗으라고 하는 게 옳지 못한 일임을 알면서 왜 그랬냐고 하니 바지를 벗으라고 한 건 다른 친구였고 자기는 그냥 옆에 서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왜 친구를 말리지 않았냐고 했더니 자신도 보고 싶었다고 했다. 짝지와 나는 번갈아 가며 둘째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여자아이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게 했고, 네가 보고 싶고 궁금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소중한 몸을 네 마음대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너의 궁금증보다 다른 사람의 몸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쁜 행동을 동조하거나 방관한 것도 똑같은 잘못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선생님을 통해 이미 사과했지만, 우리는 여자아이의 부모와 대면하여 직접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파티에 참석한 여자아이의 부모를 찾아갔고 나는 그 아이의 엄마에게, 짝지는 아빠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처음에 그 아빠는 인사조차 받기를 꺼리더니 대화를 통해 우리의 진심이 전달돼서인지 십 대 아이들이었으면 범죄였겠지만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괜찮다며 나중에는 마음의 문을 열었다. 여자아이의 엄마도 사과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많이 놀랐는데 이제는 이해한다며 웃으며 말했다. 긴 대화 끝에 이 엄마는 더 솔직한 속마음을 표현했다. 어떤 엄마는 나처럼 먼저 다가와 사과했지만, 어떤 엄마는 이 사건이 별일 아닌 듯 사과 한번 없이 넘기는 모습을 보며 매우 언짢았다고 했다.
짝지는 이번 일을 계기로 동성으로서 아들들의 성교육에 대한 더 큰 책임감을 느꼈다.
전날 둘째 아이 유치원 파티에서 온 에너지를 다 쏟은 우리는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파티에는 지각하고 말았다. 폭염이 극심했던 주였는데 파티 시간도 오전 10시 반에서 8시 반으로 변경되고 종료 시각도 12시로 앞당겨졌다. 원래는 학년말 파티인 만큼 많은 학부모로부터 다양한 물품도 후원받고 각자 가져온 음식들을 뷔페로 나눠 먹으며 여유 있는 파티 형식으로 진행되는 거였는데 이상 기온으로 뷔페도 생략되고 프로그램도 간소해졌다.
파티 준비금으로 사용된다고 하여 첫째 아이의 학교에서도 추첨 티켓을 20유로 치나 미리 구매했었는데 하필 티켓을 집에 두고 왔다. 덕분에 짝지는 한증막 더위를 뚫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집으로 가는 수고를 감행했다. 근데 또 열쇠를 깜빡하고 안 가져가 아침부터 생고생만 했다. 이래서 사람은 휴식이 필요하다. 강행군으로 우리 둘 다 나사가 빠진 거처럼 굴게 되니.
초등학교의 추첨 선물은 차원이 달랐다. 드론, 컴퓨터, 테팔 프라이팬, 미니 당구대 등 다양한 상품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첨의 행운은 우리를 비껴가고야 말았다.
둘째 딸을 위해 파티에 참석한 시몽 엄마 소피와 시몽 아빠를 또다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덕분에 둘째 아이도 시몽이를 만나 형네 학교지만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학생들은 노란 종이를 한 손에 들고 학부모 위원회가 앉아 있는 여러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미션을 수행하는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째 아이는 그 게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오로지 솜사탕과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교장선생님이 추첨 번호를 뽑을 때도 모든 학생이 단체로 안무를 선보일 때도 첫째 아이와 친구들은 뒤편에서 공을 차느라 바빴다.
파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교장 선생님이 마이크를 들고 돌아다니며 각 학년과 반별로 학생들을 모아 학생들이 담임 선생님에게 감사 인사할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첫째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눈시울을 붉히며 학생 한 명 한 명을 안아주고는 볼에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학년말 파티가 끝났고 무사히 한 학년을 마쳤다. 다른 나라의 문화와 언어에 적응해 가며 참 다사다난했다.
아이들도 우리 부부도 한국에 있었다면 결코 겪지 못했을 경험을 통해 보이지 않는 내공이 우리 안에 조금씩 쌓여가는 걸 느낀다. 앞으로의 삶에서 어느 순간에 그 내공이 발휘될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나와 다른 사람을 좀 더 이해하고 품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게 진짜 인생의 실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