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 학교에서 진행한 현장학습에 참여했다. 이번에는 만화 영화를 관람하러 극장에 다녀왔다. 엄마가 함께 가면 아이가 좋아할 거라는 담임선생님의 적극적인 공세에 고민할 새 없이 얼떨결에 학부모 동행자 리스트에 이름을 적었다. 학부모 동행자 중에는 엄마뿐 아니라 아빠, 할머니의 참여도도 높다. 이번에도 6명의 동행자 중 아빠는 2명, 엄마는 3명, 할머니는 1명이 있었다. 난 둘째 아이를 포함한 네 명의 아이를 맡았다. 둘째 아이, 막신(Maxine), 디에고(Diego), 마야(Maya).
일터로 떠나야 하는 엄마들은 품에 안겨 어색해하는 아이들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날 소개해 주었다.
“오늘 현장학습 시간 동안 널 도와줄 OO의 엄마야, 도움이 필요하면 이분에게 얘기해”라고 말하고선 아이를 꼭 안아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불안과 의심 어린 서먹한 눈초리로 나를 응시하는 아이들에게 몇 마디 어눌한 프랑스어를 건네며 활짝 웃으니 아이들도 마음이 놓였는지 귀여운 미소로 화답했다. 미국 LA에서 파리에 온 지 일 년 정도 됐다는 막신과는 금세 친해졌다. 선생님은 의도적으로 막신을 내 그룹에 포함했다. 다리를 꼬고 시크한 표정으로 앉아 머리를 귀 뒤로 천천히 넘기며 크리스마스 방학 때 할머니를 보러 미국에 간다느니, 아빠보다 엄마가 일을 더 많이 해 속상하다느니 자신의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조잘대는 모습이 미국 가족 영화에 으레 등장하는 캐릭터를 보는 거 같아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연신 말 걸어 주는 귀여운 막신 덕에 덜 쭈뼛댈 수 있었으니 내심 고마웠다.
현장학습 당일에는 칼바람이 불어 제법 추웠다. 이상 기온 탓인지 파리는 11월 초에도 벌써 한겨울 날씨다. 쌀쌀한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노란 조끼와 명찰을 메고 바람을 가르며 씩씩하게 걸었다. 행여나 감기에 걸릴세라 내가 맡은 아이들만큼은 외투에 붙어있는 모자를 일일이 씌어주며 걸었다. 대중교통 버스를 타고 다녀 오는 일정이라 어른들은 모두 긴장상태였다. 귀가 떨어져 나갈 거 같은 얼음장 바람을 맞으며 6분을 기다리니 버스가 왔다. 이미 만석인 버스에 햇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차례차례 밀려들어 갔다. 덕분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지만 기사 아저씨도 승객들도 재촉하는 이 한 명 없었다. 아이들은 흔들거리는 버스 안에서 제각기 잡을 수 있는 건 다 잡고 다섯 정거장을 꾹 참고 서서 갔다. 만 4살, 5살밖에 안 된 꼬마들이지만 상황 파악이 되는지 까부는 아이 하나 없이 모두 점잖았다. 만 3세부터 엄격한 훈육이 동반되는 학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아이들의 저력이 이런 데서 빛을 발하는 건가.
총 30분쯤 걸려 극장에 도착했다. 다른 학교에서도 이미 학생들이 와있어 극장 안이 복작거렸다. 따뜻한 극장 안에서 자리를 잡고는 아이들이 편하게 영화 상영을 할 수 있도록 두꺼운 외투 탈의를 도와주고는 사진을 찍었다. 버스 안에서 계속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괜찮은지 확인하고 극장에 오는 내내 손을 꼭 잡고 걸어왔더니 어느새 마음의 문을 확 열어젖힌 아이들은 각자의 성향대로 자유롭게 포즈를 취했다.
여러 개의 단편 만화가 하나의 주제 아래 상영됐다.
주제는 ‘A Deux, C’est mieux!’, ‘둘, 둘이라 더 좋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까? 완전히 다른 이야기 구조, 그림체, 캐릭터로 이루어진 전혀 다른 스타일의 7개의 영상이 연이어 상영됐다. 영상 한편 당 상영 시간은 짧게는 4분 길게는 7분이어서 총 38분 동안 영화를 감상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의 부족함을 이해해 주며 함께 있어주는 다른 존재에 대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귀여운 동물 캐릭터로 서사를 재미나게 풀어놨다. 대화 없이 소리와 음악으로 상황이 전개돼 불어를 못 알아듣는 나도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심지어 웃음 코드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제일 흥미롭게 봤던 건 '박쥐 이야기'였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낮 동안 잠에 빠진 박쥐 주변에 돼지는 춤추며 진흙 목욕하고, 고양이는 음악에 맞춰 부뚜막을 오르내리며 놀고, 젖소도 풀밭에서 율동하며 놀고, 닭과 병아리들은 줄지어 다니며 노래하고, 강아지도 마당을 뛰어다니며 신나게 논다. 박쥐는 여러 동물 친구가 재미나게 노는 소리를 들으며 꿈속에서 달콤한 잠을 잔다. 그리고 밤이 왔다. 박쥐는 힘차게 일어난다. 낮에 놀던 동물 친구들을 찾아가 그 친구들이 놀았던 방식을 흉내 내며 함께 놀자고 친구들을 일일이 깨워본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미 깊은 잠이 들어간 상태다. 함께 놀 친구가 없어 외톨이가 된 박쥐는 낙심하며 우울해한다. 그때 저쪽에서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반딧불이 같은 날개 있는 동물이 박쥐 주변을 돌며 박쥐 흉내를 낸다. 박쥐는 자신과 비슷한 친구를 발견하고는 기쁨에 젖어 그 동물과 함께 신이 나서 춤을 춘다. 그렇게 둘은 밤하늘에 빛으로 수를 놓으며 날아다닌다.
둘째 아이가 제일 재밌었다고 한 이야기는 '토끼 이야기'다. 한 아이에게 사랑하는 토끼가 있다. 그 토끼를 위해 열심히 집도 지어주고 당근 꽃다발도 준비했는데 토끼는 불현듯 땅속으로 들어가 아이로부터 도망쳐 버린다. 그때부터 토끼를 찾아다니는 여정이 시작된다. 토끼가 파놓은 굴을 따라 토끼가 싼 똥을 실마리로 토끼가 간 길을 추적한다. 땅속 굴이 연결된 사막과 바닷속을 모험하다 그만 토끼를 놓치고 만다. 그때 두더지가 나타나 아이를 돕는다. 둘이 힘을 합쳐 드디어 토끼가 있는 곳을 찾는다. 거기는 토끼들이 사는 토끼 마을이었고 아이의 토끼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한다. 아이는 토끼의 행복을 위해 힘겨운 작별 인사를 하고 토끼를 마지막으로 꼭 껴안고는 놔준다. 그리고 두더지와 아이는 함께 집으로 돌아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둘째 아이는 주인공 아이가 두더지와 함께 토끼를 찾아가는 여정이 재밌었다고 했다.
마지막에 상영한 영상도 좋았는데 하얀 바탕에 검정 선으로만 그린 이미지였다. 여자아이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나란히 서 있다. 서로를 요술 방망이 같은 걸로 치니 두 존재는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그렇게 여러 번 변신하다 결국 본모습으로 돌아온다. 서로서로 있는 모습 그대로 봐주며 더 이상 변신하지 않기로 함께 결정한다. 이야기들이 뭔가 가르치고 강요하는 교훈이 없어서 좋았다. 이미지는 부드럽고 단조로운데 색감이 너무 예뻐 귀여운 그림책을 보는 거 같았다. 아이들이 일상에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외로움과 다름에서 오는 소외감 같은 감정을 잘 찾아내 아이들의 마음을 만져주고 소통하고 싶어 하는 만화 영화 같았다. 어른이 아이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이야기가 아닌 아이가 아이를 위해 만든 이야기 같은.
이렇게 영상과 음악과 스토리의 조화가 감동을 주는 작품을 보고 나면 마음이 훈훈해지며 절로 힐링 된다. 아마 아이들도 그렇겠지?
둘째 아이와 나는 집에 와서도 계속 그날 함께 본 애니메이션에 관해 이야기했다. 둘째 아이는 인상 깊었던 장면들을 저녁 식사 내내 아빠와 형에게 열정적으로 설명해 줬다.학교로 돌아오는 버스에는 다행히 자리가 남아 몇몇 아이들은 앉아서 올 수 있었다. 유치원생들과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해 현장 학습을 다녀온다는 건 파리만큼 복잡한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야말로 이번 현장학습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현장학습은 기껏해야 고작 2시간 정도 소요될 뿐인데 항상 마음먹기까지가 힘들다. 하지만 귀찮음과 어색함을 무릅쓰고 참여하면 아이와의 특별한 추억이 생겨 매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선생님들도 고마워하고 프랑스 학교의 교육 현장도 목도하니 일석삼조다. 덤으로 아름다운 창작 만화도 봤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등 떠밀어 줄 때 힘 빼고 있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