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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랑 Oct 16. 2023

프랑스 치유 일기-이탈리아 바베노


바베노 - 밀라노- 베네치아 - 밀라노



4월 아이들의 2주 방학에는 4박 5일 일정으로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네덜란드를 계획했으나 숙박을 제공받기로 한 후배에게 아쉽게도 일이 생겨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다. 파리에 그냥 있을까 고민하던 중 밀라노 근처 바베노Baveno라는 곳에서 컨퍼런스가 있어 독일 때와 마찬가지로 여행도 할 겸 이탈리아를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서울에서 제주도 가는 표를 사듯 저가 항공인 이지젯EasyJet으로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고는 아이들의 방학이 빨리 오기를 처음으로 기다렸다. 컨퍼런스에 참여할 2박 숙소만 확정하였기에 나머지 2박은 현지에서 구하기로 하고 무작정 목적지로 향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을 날아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도착했다. 밀라노에 도착할 때쯤 창밖으로 보인 눈에 덮인 알프스산맥의 전경은 아름다움을 넘어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파리도 봄이라지만 그늘에 서면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 밀라노 역시 맑은 하늘과 햇살에 반해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컨퍼런스 측에서 제공해 준 픽업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밀라노의 휴양지 ‘바베노Baveno’로 향했다. 가는 길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에는 순백의 장엄한 알프스 산이 보이는데 가까이에는 빛나는 호수를 끼고 자리한 아기자기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눈으로 담느라 정신없어 예쁜 풍경이 다 지나가고 나서야 뒤늦게 호텔로 들어가는 막바지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휴양지는 어떤 호텔에 묵는지에 따라 그 여행의 질이 결정되는 듯하다. 우리는 디노Grand Hotel Dino호텔에 묵었다. 마조레Maggiore호수 바로 옆에 위치하여 어디에서나 탄성이 절로 나오는 비현실적인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호텔 체크인 전에 근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곳은 이탈리아의 휴양지임에도 불구하고 물가가 파리보다 확실히 저렴했다. 아름다운 호수 경치를 감상하며 이탈리아에서 피자와 파스타를 먹는 호사라니.


이번 이탈리아 여행을 하며 다양한 파스타와 피자를 먹었지만, 공통된 특성은 맛이 참 자연적이라는 사실이다. 구석 후미진 작은 식당에서 파는 피자조차도 화학조미료 같은 인공적인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파리에도 대부분의 피자집은 이탈리아 이민자가 운영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자연의 재료들만으로 담백하면서도 입안에서 살살 녹는 맛을 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심지어 두꺼운 피자도 겉은 바삭한데 안은 폭신하다. 각종 토핑과 치즈와 곁들여 먹는 폭신 바삭한 식감은 예술 그 자체였다. 이틀 동안 뷔페 조식과 함께 중식과 석식은 호텔에서 제공되는 코스 요리로 먹었다. 컨퍼런스에 포함된 사항이었는데 확실히 단체로 오니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고급 호텔의 식도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전채 요리에는 파스타나 수프가 등장하였고, 메인 요리에는 생선이나 고기 요리가 나왔다. 디저트로는 젤라또나 케이크 종류가 나왔다. 아이들도 호텔에서 5끼를 코스로 먹으며 집에서 익힌 식사 예절을 기나긴 식사 시간 동안 펼쳐볼 기회를 얻었다. 파리는 외식 물가가 너무나도 비싸 이런 고급 코스 요리가 있는 레스토랑에 아이들을 한 번도 데려가 보지 못해 내심 아쉬웠는데 그동안 못한 외식을 한꺼번에 몰아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 도착해서 잘 누리고 있는데 기어이 사건은 터졌다. 컨퍼런스 첫째 날 저녁에는 세미나를 마치고 공연이 준비돼 있었다. 밀라노에서 활동하는 성악가들과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플루티스트가 사랑의 세레나데를 두 시간가량 공연했다. 컨퍼런스에는 미국, 캐나다, 중국, 베트남, 한국, 유럽에 거주하는 다양한 한인 이민자가 300명 정도 참여했다. 우리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도 많아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인 아이들은 금세 친구가 되었다. 아빠, 엄마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연회장 앞 로비에 모여 축구도 하고 게임도 하며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며 신나게 놀았다. 짝지가 문 앞에 서서 로비에서 노는 아이들을 중간중간 확인했고 스텝들도 곳곳에 있어 난 안심하며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 성악가들과 턱시도를 차려입은 남자 성악가들의 노래가 어떻게 내 귀와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는지 느끼며 클래식 명곡을 감상하고 있었다. 


앙코르곡을 남겨두고 짝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로비로 나오니 짝지도 없고 아이들도 없었다. 아이들을 재우러 먼저 올라갔겠거니 하고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가려는데 저쪽에서 사색이 된 채 핸드폰을 들고 짝지가 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짝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아이들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잘 놀고 있는 걸 확인하고 음악에 잠시 심취해 있었는데 고 몇 분 사이에 아이들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 첫날이라 우리 아이들과 함께 있던 아이들의 부모도 누군지 모르겠고 공연이 끝나고는 300명 가까이 되는 인파가 우르르 쏟아져 나와 더 혼란스러웠다. 다른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 형제가 있어 스스로 객실로 돌아갔다손 쳐도 우리 아이들은 아직 둘 다 어려 복잡한 호텔을 다니며 우리 룸을 찾아갔을 리는 만무했다. 더구나 객실 키를 우리가 소지하고 있었다. 프런트 데스크에 우선 상황을 알리고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그 큰 호텔 안을 샅샅이 뒤지며 뛰어다녔다. 플레이룸과 수영장을 뒤지고 비어있는 연회장이나 세미나룸을 일일이 확인하며 찾아다녔다.


밖이 이렇게 깜깜한데 설마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겠지, 아이들을 믿으며 웬만한 대학교 건물보다 넓은 호텔을 미친 사람처럼 헤매며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7살, 5살의 남자아이들을 봤냐며 물으며 다녔다. 호텔 직원들도 함께 아이들을 찾았다. 이탈리아에 마피아가 있다는 사실과 납치의 가능성과 최악의 상황들이 스쳐 가며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렸다. 30분쯤 지났을까. 잠시 숨을 고르느라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는데 행사 주최 측 스텝이 아이들을 찾았다고 달려왔다. 


알고 보니 같이 놀면서 친해진 형과 친구를 따라 그 객실에 가서 놀고 있었고 그 아이들의 부모도 공연이 끝나고 와보니 모르는 아이들이 있어 프런트 데스크로 데리고 나온 것이다. 어디 가지 말고 연회장 앞 로비에서만 놀라는 약속을 왜 안 지키고 갔냐 캐어물으니 너무 신나서 약속을 잊어버렸다고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말하며 화가 난 엄마를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긴 대화를 통해 아이들에게 사태의 심각성과 앞으로의 규칙을 다시금 일깨워 주고 아이들을 각자 침대에 재웠다. 그러고 나서야 킹사이즈 침대라는 감격도 잊은 채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며 마음의 진정을 되찾았다.

처음에는 다른 아이들까지 같이 없어진 거라 그 아이들의 객실로 갔겠다 추정하며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연이 완전히 끝나고 모든 어른이 각자의 객실에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소식이 없으니 나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으며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아이들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좋은 럭셔리 호텔도 지옥으로 변했다. 그깟 클래식 공연이 뭐라고 그걸 보고 있었는지 자책하며 동시에 아이들을 제대로 안 본 짝지에게 이기적인 원망이 나왔다. 

아무리 좋은 환경도 그 환경 자체만 좋으면 소용이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수많은 요소의 합에 문제가 없을 때, 문제가 있어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일 때 평안함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요소가 잘 갖춰질 수 있는 건  결코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이 사건은 여행 분위기에 한껏 취해 행복감에 고양돼 있던 높아진 내 마음을 다시금 밑으로 끌어내렸다. 천국에서 한순간에 지옥을 경험할 수도 있는 인간의 한계와 상황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 자신을 돌아봤다.


둘째 날에는 엄마들이 세미나 듣는 걸 포기하고 함께 아이들을 돌봤다. 아이들은 오전과 오후에 수영을 두 번이나 하고, 호텔 내 정원에 흔하게 다니는 야생 도마뱀을 구경하고, 정원에서 뛰놀며 대형 체스를 두었다.

독일에서 온 엄마들이 많았는데 독일과 프랑스의 분위기나 교육 환경을 비교하며 엄마들도 아이들 못지않게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둘째 날에는 배를 타고 섬 전체가 정원인 이졸라벨라Isola Bella 섬으로 투어를 다녀오는 시간이 주어졌다. 10분 정도 배를 타고 갔는데 섬 자체가 물 위에 떠 있는 정원 같았다. 단체로 왔기에 시간에 쫓겨 그 안에 성을 다녀오진 못했지만, 특히 궁전 안 정원은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고 꼭 가보라며 유럽에서 오랫동안 산 사람들에게 추천받았다. 알겠다고 꼭 그러겠다고 대답하면서도 과연 우리가 이곳을 또 올 수 있을까 생각하니 못내 아쉬웠다. 둘째 날과 셋째 날은 산책을 틈틈이 했다. 호수를 바라보며 홀로 멍하니 앉아있기도 하고, 호텔 투숙객만 갈 수 있는 호수 산책로를 짝지와 함께 걸으며 인생 사진도 건지고, 내 앞에서 목을 꼿꼿이 세우고 우아하게 유영하는 백조와 따스한 햇볕 아래 일광욕 중인 오리와 이야기도 해보고, 이렇게 멋진 경관을 매일 질리도록 보는 이곳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여유가 있을까 상념에 잠기다가도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 자문하며 걸었다. 이틀 동안 눈과 입이 호강하며 정말 잘 쉬었다. 


애초에 안식년처럼 보내기 위해 파리에 왔지만, 돈을 벌기 위한 일만 안 할 뿐, 고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건 같았다. 외려 경제활동을 안 하는 게 과연 잘살고 있는 건지, 나에게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 물으며 이 시기를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에 때론 한국에서의 삶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이탈리아 바베노 여행은 파리에서 보냈던 일상의 패턴을 깨고 충전할 수 있었던 감사한 시간이었다. 이제 동화 속 세상 같았던 바베노를 뒤로하고 밀라노로 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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