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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랑 Oct 16. 2023

프랑스 치유 일기 - 독일

독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아이들의 방학이 또 찾아왔다. 지난 12월 말부터 1월 초까지 아이들에게 간식 포함 하루 네 끼를 챙겨주며 견학과 나들이를 정신없이 다녔던 방학이 엊그제 같은데 또 방학이라니. 그만큼 6주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는 방증일 테다.

이곳 아이들은 2월 방학을 스키 방학으로 간주한다. 만 3~4살부터 스키를 배우고 타는 비용이 저렴해 많은 아이가 방학을 맞아 부모님과 함께 스키를 타러 알프스산이나 피레네산으로 떠난다. 아이들을 스키강사에게 떡하니 맡겨놓고 어른들도 자유롭게 스키를 즐길 수 있어 부모들 또한 스키 방학을 기다린다. 


한국에서 스포츠를 즐기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비용이다. 파리에 와서 스포츠용품 전문 판매점 Decathlon에 갔을 때 스포츠 관련 의류와 장비가 매우 저렴하여 놀랐었다. 튼튼한 축구화가 12유로이고 수경은 5유로밖에 안 한다. 테니스, 축구, 농구, 수영, 스키, 러닝, 요가, 등산, 자전거, 스케이트 등과 관련된 양질의 물품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는 걸 보며 순간 구매욕이 치솟아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의 친구들은 스키를 타러 떠났지만, 우리 가족은 3박 4일의 일정으로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다녀왔다. 스키는 아이들이 프랑스어를 더 잘하게 될 내년으로 미루어 두긴 하였으나 실상은 부모인 우리조차 스키를 타본 적이 서너 번밖에 없어 스키 방학을 선뜻 추진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참석하고픈 행사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겸사겸사 하이델베르크로 여행지를 정했다.


기차보다 저렴한 대형 관광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의무적으로 쉬어야 하는 시간을 포함하여 총 7시간이 걸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첫 번째 휴게소에서는 집에서 싸간 엄마표 샌드위치로 아침을, 두 번째 휴게소에서는 아빠표 유부초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휴게소에서 부실한 샌드위치를 10유로 가까이에 파는 걸 보고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며 샌드위치와 유부초밥을 준비해 가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중간중간 쉬어가니 지루하긴 했어도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드디어 목적지인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독일에 들어서니 확실히 프랑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집들도 단조롭고 수수하여 파리의 집들에 비해 한껏 힘을 뺀 듯 보였다. 14세기에 문을 연 오래된 대학과 1000년에 가까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유서 깊은 도시여서일까. 하이델베르크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도시 곳곳에 조성된 대학도시임에도 청춘의 생기발랄하고 생동적인 에너지보다는 뭔가 정적이고 절제된 차분하고 조용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독일 최초의 대학이며 노벨상 수상자를 56명이나 배출한 세계적인 명문 대학이다. 


호스텔은 룸도 깨끗하였으며 식사도 훌륭했다. 조식은 까망베르, 에멘탈, 체다 등 다양한 치즈와 순대처럼 빨갛거나 하얀 동그라미 또는 네모 모양에 치즈나 파프리카가 박혀있는 가지각색의 소시지와 빵 그리고 갖가지 요플레와 과일 음료가 푸짐히 준비되었다. 석식은 풍성한 샐러드를 곁들인 독일 음식이 나왔는데 주로 파스타와 감자 그리고 훈제 고기 스테이크나 볶은 고기 종류였다. 호스텔 바로 옆에는 동물원이 있는데 행사 주최 측에서 아이들을 위한 동물원 체험 프로그램을 마지막 날 피날레로 준비하였다. 선생님들과 아이들만 참여하는 행사라 우리는 가보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매우 만족스러워하였다. 호스텔 뒷문으로 나오면 네카강을 따라 쭉 뻗은 산책로가 연결돼 있다. 그곳을 거닐 때면 철조망 사이로 플라밍고, 너구리, 여우와 같은 동물과 놀이터가 있는 동물원 내부를 엿볼 수 있다. 


산과 강을 동시에 바라보며 자연 속에 파묻혀 맑은 공기와 햇살 아래 걷는 산책은 어디에서든지 황홀하다.  하이델베르크는 산과 강과 고성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아름답고 평온한 도시다. 파리를 보면 한국을 떠올릴 일이 없는데 이곳의 소박한 산을 보고 있자니 인왕산과 북한산의 아름다운 능선이 겹쳐 보였다. 파리가 휘황찬란하고 세련된 예술의 도시라면 하이델베르크는 지적이고 꾸밈이 없는 소탈한 도시였다. 밤이고 낮이고 화려하고 우아하게 빛나는 파리의 다리만 보다가 밤에도 불빛 하나 없이 기능에만 충실하여 묵묵히 놓여 있는 이곳의 낡고 밋밋한 다리를 보니 다리만 보더라도 확연히 대비되는 두 도시가 새삼 재밌게 느껴졌다. 행사 중에 자유롭게 탐방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아이들을 맡기고 우리 부부만 나온 거라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유스호스텔에서 비스마르크 광장까지 걸어가면 45분밖에 안 걸리지만 우리는 1분도 허투루 쓸 수 없기에 그다음 날 새벽 3시까지 모든 대중교통을 무한 이용할 수 있는 종일권 티켓(€4.85)을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구입했다. 독일에서는 버스를 탈 때 티켓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탄다. 그러나 불시에 검수원들이 버스에 랜덤으로 올라타 승객이 올바른 티켓을 소지하고 있는지 점검한다. 우리도 이날 검수원들과 맞닥뜨려 자신 있게 표를 보여주는 경험을 하였다. 


칸트, 괴테, 헤겔 등 여러 철학자가 사색하며 걸어 유명해진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과 30년 종교전쟁과 벼락으로 훼손되어 이제는 유적으로 남은 ‘하이델베르크 성’은 이름난 관광지였지만, 시간상 직접 가보지는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거로 만족해야 했다. 


관광 명소로 유명한 학생 감옥도 사진으로 충분히 봐서 그냥 지나쳤고 성령 교회만 가는 길에 있어 유일하게 제대로 보았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부속 교회로 지어진 고딕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이 거대한 교회에서는 종교 전쟁 후 예수회와 개신교의 질긴 대립과 분열이 숱하게 있었다. 신·구교가 교회 내 장벽을 설치하고 따로 예배를 드리다가 지금은 개신교 교회가 된 곳이다. 하지만 이 역사적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채광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교회 내부는 평화로워 한참을 앉아있었다. 


구시가지를 걷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골목의 창밖 풍경을 배경으로 라떼와 당근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늘 그렇듯 짝지와 가슴 벅차오르는 대화를 나누었다.

짝지와 나는 성향상 극과 극의 사람이다. 여느 커플처럼 그 반대의 매력에 끌려 5년의 연애 끝에 결혼한 10년 차 부부다. 우리는 둘 다 태생적으로 불같은 에너지를 소유하였고, 굴곡지고 순탄치 않은 가정환경 덕분에 내면과 온몸에 분노가 축적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20대 초에 만나 사랑도 열과 혼을 다하여 열렬하게 했고, 그 열정이 사그라지고 나서는 서로 죽일 듯이 미쳐 날뛰며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우리 부부가 지금까지 진정한 소울메이트로 지낼 수 있는 건 사랑할 때뿐 아니라 싸우고 나서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해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흔히 커플들은 서로의 다름으로 끌리지만, 사랑의 온도가 식는 순간 그 다름으로 서로에게 질리게 된다. 자라온 환경과 성향, 생활 방식과 인식의 차이로 소통이 안 되니 오해와 서운함이 쌓인다. 콩깍지가 벗겨지고 내 사람이 되어 익숙해지면 관계의 긴장감은 소멸한다. 싸움은 잦아지고 정은 떨어지니 서로를 품어줄 여유조차 사라진다. 여러 이유로 이혼은 자신 없으니 대개는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영역을 지키며 파트너십만 간신히 유지한 채 살아간다. 부딪쳐서 싸워봤자 상처만 깊어지니 마음에서 나오는 깊은 대화를 피하게 된다. 대화도 섹스도 사라진 부부관계는 어느새 낯설고 어색해진다. 그렇게 서로를 포기한 채 자식을 위해 서로를 견디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커플들이 우리 주변만 봐도 허다하다.


우리 부부는 둘 다 그런 부모를 두었다. 부부싸움이 일상인 가정에서 무책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러기에 우리 부부만큼은 그러한 부부가, 부모가 되지 말자는 다짐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에게도 두텁다 믿었던 관계가 부지불식간에 허물어지는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순간마다 마음의 아주 작은 앙금도 남겨두지 않기 위해 사소한 감정까지 토해내며 끈질기게 대화를 시도했다. 그것이 다시 격한 싸움으로 번져 서로의 가장 아린 상처를 건들며 공격할 때도 있었고, 서로에게 무릎 꿇고 부둥켜 울며 사죄한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향한 아주 작은 감정의 찌꺼기조차 남겨두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싸우다 보니 서로가 분노하는 지점을 깨달았고, 분노의 원인을 함께 찾아가는 대화를 집요하게 나눴다. 서로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조각들을 찾기 위해 싸울 때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 안에 실제로 치유가 일어나니 나중엔 그 여행을 즐기게 됐다. 


흔히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국룰처럼 맹신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고치면 더 잘 쓸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하루 중 아이들을 재워두고 대화하는 시간이 우리에겐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그 대화를 통해서 서로를 격려하거나 위로하고, 서로에게 화나거나 서운한 감정을 털어놓기도 하고, 어떤 일의 조언을 구하거나 논쟁도 하고, 삶의 방향을 함께 점검하며 미래를 계획하고, 지난날을 반추하고 성찰하기도 한다.


물론 서로의 다른 언어를 맞춰가는 지난한 과정은 뼈저리게 고통스러웠다. 모든 자존심과 격을 서로 앞에 무장해제시키는 단계에서는 피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너와 나는 허물투성인 인간이라는 것을 몸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옳음과 정당성을 관철하고 상대를 굴복시킴으로써 상대방의 틀림을 증명해 내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우리 관계에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인지 알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앞가림조차 버거워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관계는 친밀한 친구 그 이상의 관계로 정말 하나로 완성되어 가는 관계로 발전하는 걸 느낀다.


서로의 다름을 통해 더 다양한 측면에서 현상과 사물을 볼 수 있으니 지혜는 배가 되고, 서로의 단점이 서로의 장점으로 채워지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순간에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말 못 할 감사가 우러나온다. 수많은 다툼과 대화를 통해 이제와서 우리 부부가 깨달은 건 서로의 다름이 상호보완 되어 한 팀을 이룬 부부에게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하고 관계는 더 깊고 충만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난 우리의 10년 후가 기대된다. 짝지의 10년 전 모습을 뼛속들이 잘 아니 지금 훌쩍 성장한 짝지의 모습이 놀랍고 멋있어 보인다. 10년 후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한층 더 깊어진 인품을 지닌 매력적인 중년의 남자로 성숙해 있을지 기대된다. 


독일은 식자재나 생필품이 저렴하기로 유명하다. 워낙 싸서 대부분이 프랑스 가격의 절반 이하다.

거기에다 질까지 좋아 dm이라는 가게에 가서 엄청 사재기하고 왔다. 발포 비타민(0.40), 감기 사탕(€2.25)과 차(€0.95), 핸드크림(€0.90), 탈모 샴푸(€4.55), 당근 오일(€2.75), Q10크림(€2.95), 생리컵(€9.95), 치약(€2.45), 유기농 비누(€0.75), 화장솜(€0.80)등 참 다양하게도 샀다. 감자칩도 파리에서는 3유로에 가까운데 여기는 0.88유로다. 트롤리나 하리보 젤리도 0.99유로다. 과자는 성분도 착해 무글루텐에다 마늘, 양파 같은 양념 가루도 대부분 천연 성분이다. 이번 하이델베르크 여행은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함께 영화, 연극, 게임, 만들기 등 다양한 활동과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즐거운 시간이었고 우리도 남이 차려준 삼시 세끼 잘 먹고 잘 쉬면서 보낸 알찬 여행이었다.


독일은 우리가 프랑스에 와서 처음으로 가본 다른 유럽 국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에 대한 인상도, 나라 분위기도 프랑스 파리와 무엇이 다른지 책이나 티비가 아니라 피부로 직접 느끼고 겪을 수 있어 좋았다.

다음 바캉스 여행지는 중학교 동창과 대학 후배가 사는 네덜란드로 계획했지만, 재정 상황상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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