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간실격 리뷰
2021년 하반기 가장 기대를 모은 <인간실격>은 예상한 대로 한없이 어둡고 묵직했다. 드라마에서 단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자살'이라는 소재를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드라마 마니아라면 반드시 봐야만 하는 숙제처럼 견뎌내며 의무감으로 시청을 했다. <인간실격>은 어떠한 흥행이나 주목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 '드라마는 우선적으로 재밌어야 된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정 반대의 대치점에서 시작한 작품이었다.
시놉시스처럼 부정과 강재는 힘든 상황 속에도 서로를 위로하며 한 줌의 희망을 품는듯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둘은 중후반부까지 끊임없이 나락으로 빠지는 모습들만 보여준다. 결국 끝없는 나락에서 '인간의 자격'이라는 것을 묻는 지경까지 다다르는데, 그것이 결국 텍스트로 언급이 안되었을 뿐 '자살'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다자이 오사무의 동명 소설 <인간실격>과 궤를 같이한다. 결국 이 작품은 드라마에서 절대 다루기 힘든 '자살'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불합리한 이 사회에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고통을 비춰내고 있다. 죽어야 할 이유를 찾아 방황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는 전개가 마치 전도연의 희대의 걸작 <밀양>을 보는 듯하다. 이러한 도전만큼은 정말로 칭찬하고 싶은 부분이다.
자살이라는 키워드와 더불어 이 작품을 드러내는 건 불륜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불륜은 막장드라마에서 이야기하는 불륜과는 조금 다르다. 나락으로 가는 길에 동반자가 필요했던 부정과 강재의 만남은 사랑과 연민 사이 그 어디쯤에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을 바라보는 보편적인 시선들은 둘의 관계를 불륜으로 바라보고, 두 사람 역시 그 시선을 인지하고 피해 다닌다. 결국 이 둘을 바라보는 불륜이라는 시선이 극의 긴장감을 만드는 장치로 사용된다.
부정의 남편 정수와 전 애인인 경은 역시 외로움을 빗댄 만남을 보여주지만, 이 또한 다른 시선에서는 그저 불륜으로 보일 뿐이다. 결국 이 네 사람의 연민을 가장한 사랑이 진정 불륜인지에 대한 질문을, 그들의 외로움과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던져진다. 하지만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어둠이 이 '불륜'이라는 감성을 강하게 짓누르고 있어서, 그러한 질문도 허공에 맴도는 듯한 느낌이다. 삶의 희망을 잃어가는 그들에게 그저 불륜은 큰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허공을 맴도는 질문들은 결국 마지막 대사를 통해서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질문을 던지고 만다.
이 작품을 짓누르고 있는 아픔과 상실의 이야기는 결국 절망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깊은 절망감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아무리 극 중간에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한 줌의 빛처럼 사라지고 흩어져 버린다. 이러한 끊임없는 절망의 반복은 자살의 과정과 이유로 받아들여지면서, 조금씩 그 아픔에 공감을 하게 된다. 이 부분이 바로 <인간실격>과 자주 비교되는 <나의 아저씨>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사람이 행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사회의 보편적 습성에 대한 상처와 그것에 대한 위로를 다룬 <나의 아저씨>와 다르게, <인간실격>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아픔과 그것에 대한 위로를 다룬다. <나의 아저씨>가 희망의 위로라면, <인간 실격>은 절망의 위로였다.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기 위해, 강재와 부정이는 그리움의 대상자에게 끊임없이 안부를 묻는다. 이들의 그리움은 이러한 안부를 통해 지속적으로 드러나며, 간간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이 두 사람은 삶의 희망을 놓지 않게 된다. 그저 가벼운 안부 문자일 뿐이지만, 건네기 힘든 안부를 시작으로 이 두 사람은 위로를 받고 치유하게 된다.
연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허진호 감독과 김지혜 작가가 그려내는 이 작품의 디테일은 마치 텍스트화하여 읽혀지는 한편의 문학 소설처럼 느껴진다. 그 디테일과 결이 드라마가 아닌 책을 읽고 있는듯한 착각에 들게 한다. 대사 한 단어 한 단어, 복선으로 사용되는 연출적 요소 하나하나가 곱씹을 만큼 우아하고 유려하다. 하지만 그 책은 깊은 상실감과 슬픔을 이야기하는 두꺼운 문학 서적 같고, 읽고 싶지 않지만 꼭 읽어야만 하는 괴로운 숙제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드라마의 문학적 탐구는 자칫 위험한 연출로 읽히기도 한다. 작가와 감독이 의도하는 상실과 아픔에 대한 공감이 안될 시, 이 모든 연출적 시도가 그저 허세처럼 보여진다는 것이다. 마치 연출들이 작가적 야심과 연출적 감각이 있어 보이는 '척'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사실 나 역시도 어떤 신에서는 약간 실소를 머금었으며, 연출과 작가의 의도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칫 위험해 보였던 이런 허세와 실세 사이에서 한 끗 차이로 작품을 구원한 것은 바로 배우들의 연기력, 무엇보다도 류준열과 전도연이 보여준 명연기였다.
류준열의 아우라는 이 모든 허세를 극복하고도 남을 정도로 아찔한 매력을 선보인다.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보다 작은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서 만들어내는 디테일이 실로 놀랍고 감탄스러울 정도이다. 묵직하면서도 나른한 목소리와 시선을 잡아끄는 눈동자는 섹시미와 퇴폐미를 넘어 어둠 속 보석 같은 강렬한 마력을 선사한다. 이미 수많은 작품으로 좋은 배우라는 것은 알았지만,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도연의 연기는 이미 여러 영화에서 보아왔던 연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무엇보다 나락의 끝을 보여줬던 <밀양>의 그 숭고한 연기를 다시 끄집어 내면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전도연이란 명배우가 있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여전히 아이 같은 목소리는 류준열과의 나이 차를 극복하는 무기가 되고, 의도된듯한 순수하면서도 섹시한 몸짓은 그녀만의 남다른 매력과 아우라를 이끌어 낸다. 무엇보다 근래에 본적도 없는 어둡고도 불안했던 부정이란 캐릭터를 <밀양>에 이어 다시 한번 연기한 전도연의 도전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아란을 통해서 현 드라마의 비현실적인 부분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몸과 마음이 아파도 드라마틱한 전개를 위해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드라마들을 비판하면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드라마의 관습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 우리는 TV을 통해 힘든 하루를 위로받고, 우리와는 다른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간접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것만이 TV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현실과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가끔은 아프고 어두운 삶도 드라마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외면했던 진짜 현실일지라도 말이다.
허진호 감독 특유의 느림의 미학이 만들어내는 여백과 여운, 그리고 빌드업은 이 작품의 기운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동안 보여줬던 작품들처럼 역시나 눈부신 내공을 선사하지만, 16부작이라는 드라마의 리듬과는 언밸런스한 게 느껴져 제법 지루한 감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빠른 리듬의 드라마에 익숙해져 있는 시청자들에게 다른 감성을 전달하려 했던 허진호 감독 특유의 연출적 의지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어둡고 괴로운 이야기에 느린 전개까지 더해 이야기는 한없이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런 느림 안에서 몇몇 장면들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찔한 연출을 보여준다. 특히 7화의 모텔신과 11화의 텐트신은 드라마로서 보기 힘든 경이로운 경지였다.
결국 허진호 감독이 만든 느림의 미학과 차근차근 쌓아놓은 빌드업은 후반부 커다란 울림을 준다. 조금씩 빨라지는 피아노 선율처럼 조금씩 고조되고 쌓여가는 감정들의 울림은 이 작품의 길고 긴 노력에서 얻게 된 절대적 가치처럼 느껴진다. 이는 마치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의 다림이 사진관에 돌을 던지는 순간이나 <행복>에서 영수의 마지막 통곡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결국 허진호 감독이 만들어낸 서사의 파동은 2시간짜리 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16시간이라는 깊이로 쌓이고 쌓여 거대한 파도가 된다. 그것은 결국 죽어야 하는 이유와 그래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대변하는 강렬한 빛으로 작용한다.
<인간실격>을 보고 재미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아마 솔직한 답변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 작품을 본 것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의 작가적 야심에 호응한 나의 허세도, 평론가 마냥 끄적대는 지적 우월함도 아니다. <인간실격>은 드라마라는 매체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깊이까지 내려간 작품이다. 드라마라는 TV 매체에서 보여준 이 작품의 도전, 그리고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커다란 울림만으로도 나에게는 둘도 없는 시간이자 경험이었다. 나는 그 부분만큼은 진심으로 극찬한다.
20년대 좋은 드라마들을 리뷰합니다.
위 글은 블로그에 썼던 리뷰들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