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리뷰
<폭싹 속았수다>를 리뷰하기 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이 얼마나 좋은 작품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각자가 느낀 그대로 이 작품을 공감하고 위로받았다면 그걸로 전부이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작품이 이룬 경지를 하나둘 언급하는 정도일 것이다. 드라마라는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매력을 최대치로 선사하는 작품, <폭싹 속았수다>이다.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3세대를 거쳐 다루는 <폭싹 속았수다>는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인생 이야기를 다룬다. 인생사를 4계절로 빗대어 그리는 이 흔한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 혹은 부모님의 이야기가 되어, 커다란 공감대와 함께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울림을 선사한다. 결국 이 작품은 힘든 삶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갈 모든 세대들에게 던지는 '수고했다'는 위로를 던지는 작품이다. '그렇게도 기꺼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인생사를 어루만지면서 말이다.
특히 모든 세대를 아우르고 관통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 꺾이는 꿈보다 더 큰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커다란 울림을 선사한다. 무조건적인 부모의 사랑, 그것을 알아서 더 마음이 아픈 자식들의 이야기를 이 작품은 3세대를 거쳐 수많은 에피소드를 통해 그려내고 또 어루만진다. 결국 1화의 광례의 대사가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이야기를 명확히 요약한다.
전부 다 내 지게 위에만 올라타는데
이 콩만한게 자꾸 내 지게에서 내려와.
자꾸 지가 내 등짐을 같이 들겠대.
그러니 웬수지.
내 속을 제일루 후벼파는 웬수지.
이 작품은 기성세대의 이야기를 무조건적인 존경으로 그리지 않는다. 영화 <국제시장>처럼 기성세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사가 아닌, 세대와 가치관의 변화를 그리는 디테일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딸은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세대를 거쳐가는 과정에서 명확히 그려내면서, 이전 세대에 대한 애환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가부장 제도와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하던 시절, 여자가 배를 타면 재수 없다는 말을 무시하고 배에 올라타는 금명이와 식사 자리에서 관식이가 돌아서는 '혁명적 반바퀴' 장면은 그러한 가치관의 변화를 제대로 그리고 있는 명장면이다. 결국 상을 엎은 관식이와 그렇지 못한 영범이의 비교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그리는 능력, 낭비 없이 그리는 개성 강한 캐릭터들, 웃음과 눈물의 드라마틱한 조화 속에 신파처럼 보이지 않는 구성까지 임상춘의 필력은 역시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응답하라>시리즈처럼 시대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마치 이스터에그처럼 곳곳에 숨겨놓은 여러 시대를 반영한 배경들은 또 한 번 그녀의 능력에 감탄하게 만든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유독 돋보였던 것은 걷잡을 수 없이 황홀했던 맛깔나는 대사. 마치 한편의 문학 소설을 읽는듯한 나레이션과 가슴을 후벼파는 대사들은 감정을 뒤흔드는 형용할 수 없는 울림을 선사한다.
이전 <동백꽃 필무렵>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임상춘 작가는 <나의 아저씨>의 박해영 작가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 삶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고 치유해가는 과정에서 작가가 전달하고픈 말을 대사에 정확히 실려보낸다. 두 작가의 차이는 대사 자체의 멋에 있는데 임상춘 작가의 대사는 쉽고 편안한 단어들로 멋스러움보단 맛스러움에 더 큰 초점을 맞추는 대신, 박해영 작가는 문어체적인 대사들로 작가의 생각을 좀 더 노골적으로 담아낸다. 수많은 명대사들이 허세적이거나 가르친다고 느껴지지 않고, 맛깔스런 대사들이 주는 따스함에 커다란 울림과 공감을 받게 된다.
김원석 감독은 <미생>, <시그널>, <나의 아저씨>에 이어 또 한 번 대중들에게 인생 드라마를 선사한다. 그가 그리는 압도적인 디테일과 미장센의 완성도야 수없이 봐왔지만, 이번 작품에서 유독 돋보이는 것은 바로 작품 전체에 유지되는 극강의 자연스러움이다. 시대 배경의 미장센부터 날씨와 계절감, 모든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부터 동선에 제스처까지 그 무엇 하나 튀지 않고 조화롭게 화면에 담아낸다.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이렇게까지 미장센의 디테일에서 흔들림 없이 물 흐르듯 모든 장면을 담아내는 것은 실로 엄청난 능력이다.
또한 김원석 감독이 선사하는 편집의 묘미는 최근 엉망진창 편집을 보여주는 여타 드라마들에게 편집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걸 마치 교범처럼 보여준다. 드라마틱한 리듬감은 평범한 이야기 안에서도 지루할 틈을 안 주며, 시대를 넘나드는 교차 편집안에서도 사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면서 누구나 쉽게 메시지를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 애순이가 계장이 되는 이야기에서 광례와의 부급장 에피소드를 꺼내고, 애순이가 힘들다고 할머니를 찾아왔을 때 자연스럽게 광례와 할머니의 영정사진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은 극본의 구성만큼이나 이를 다룬 편집력에서 실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시대고증과 디테일이 살아있는 미술 배경과 그 안에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청록색 컬러를 그려내는 류성희 미술감독의 만듦새는 또 한 번 그녀만의 독보적인 아우라를 느끼게 한다. 감정 과잉 혹은 신파로 보이지 않게 감성을 완벽히 조율해 내는 음악과 적재적소의 OST 그리고 엔딩 음악까지, 모든 부분에서 드라마라는 매체가 구현할 수 있는 최대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맛깔스런 대본과 미술, 그리고 이를 진두지휘하는 감독 아래 이 작품의 모든 배우들은 사람 냄새나는 캐릭터를 완벽히 연기해 낸다. 극강의 자연스러움은 결국 완벽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주조연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찰떡처럼 맞아들어가며 눈부신 캐릭터쇼를 선보인다.
역시나 가장 칭찬해야 하는 건 모두가 수긍하는 염혜란의 광례 연기이다. 고단한 삶과 어미의 한을 완벽히 그려낸 염혜란의 경이로운 연기는 초반부 자칫 뻔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에서 놀라운 몰입도를 가져온다. 여기에 시어머니인 나문희와 주고받는 연기는 마치 반칙 같은 케미로 국내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아우라를 선사한다.
연민의 마스크로 자신의 연기력 최대치를 선사하는 박보검부터, 청년 애순과 관식의 톤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질감 없이 연기한 문소리와 박해준까지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극의 중심을 뚝심 있게 끌고 나간다. 인생의 후반부를 그리는 문소리와 박해준의 연기는 깊어지는 주름만큼 가늠하기 힘든 깊이를 보여준다. 미워할 수 없는 빌런 역할을 맛깔나게 연기한 학씨 아저씨 최대훈의 연기는 무엇이 애드립이고 연기인지 구별이 안갈 정도였고, 금명의 두 남자를 연기한 이준영과 김선호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었다. 까메오로 출연한 배우들도 하나같이 본인들의 매력을 드러내며, 신인 배우부터 아역 할 거 없이 모든 배우들이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배우의 합과 캐스팅이 이렇게까지 완벽한 드라마가 또 있을까 싶다.
이전 아이유의 <나의 아저씨> 연기를 보면서, 어쩌면 이보다 더 뛰어난 연기를 보는 건 그녀에겐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아이유의 '이지안' 연기는 그 상처와 아픔, 그리고 드러내지 말아야 할 감정들을 온몸으로 전달 시키는 실로 소름 끼치는 연기였다. 그런 아이유가 이렇게 빨리 이지안을 지워낼 거라고는 사실 상상도 못했다. 애순과 금명을 전혀 다른 톤으로 그려내는 발성과 삶의 무게를 표현하는 제스처, 표정 하나하나에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연기까지 두 세대를 연결하는 엄마와 딸의 연기를 너무도 완벽히 소화해낸다. 감정의 표현을 여과 없이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능력과 나레이션에서 느껴지는 발성의 테크네이션, 무엇보다 이제는 엄마 연기까지 소화하면서 30대 이후로도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동안 자신의 연기한 모든 캐릭터들을 집대성해 애순과 금명이에게 쏟아부으면서, 인생을 아우르는 두 인물의 삶을 신들리게 연기해 낸다.
분명 아이유는 좋은 연기를 하는 뛰어난 가수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대한민국 국보급 여가수라는 커리어에 견줄만한 국보급 배우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두 편의 인생 드라마인 <나의 아저씨>와 <폭싹 속았수다>의 중심에 그녀가 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해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은 김태리가 0순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혀 졌다. 아이유는 현재 백상 여우주연상에 가장 근접해 있으며, 대상을 수상한다고 해도 이견이 없어 보인다.
매주 금요일마다 <폭싹 속았수다>를 방에서 혼자 보면서 눈물을 훔쳤고, 거실로 나와 다시 한번 온 가족과 함께 보면서 행복한 시간을 공유했다. 그 시간 가족과 함께 나눈 웃음과 눈물에서 실로 오랜만에 드라마란 매체의 순기능을 체험할 수 있었다. 드라마가 끝날 때마다 한 번 더 부모님에게 안부 전화드리게 되는, 한 번 더 딸내미 손을 어루만져 주게 되는 따스함을 이 작품은 기꺼이 마음속에 새겨 놓는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드라마 리뷰를 시작한 지 7년째.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은 작품들은 있었지만, 언젠가 <연애시대>와 <나의 아저씨>에 견줄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그동안 만점을 주지 못했었다. 결국 그토록 만점을 망설였던 이유가 바로 이런 작품이 나오길 기다렸던 게 아니었을까? <폭싹 속았수다>는 '인생 드라마', '역대급 드라마', '올해의 드라마'등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수식어 좋아하고 평가질 좋아하는 나 같은 3류 드라마 리뷰어에게 이건 최고의 찬사이다. 드라마 속의 아름다운 시절처럼 나에게도 다시는 오지 못할 행복한 봄날이었다.
20년대 좋은 국내 드라마들을 리뷰합니다.
위 글은 블로그에 썼던 리뷰들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