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타트업 리뷰
<스타트업>은 <너의 목소리가 들려>부터 <당신이 잠든 사이>까지 늘 흥미진진한 전개를 보여줬던 박혜련 작가의 작품이다. 무엇보다 박혜련 작가의 특기였던 판타지 요소를 배제한 이번 작품은 어떤 매력을 보여 줄지 궁금했다. 스타트업이라는 창업의 소재도 신선했지만, 무엇보다 서브 주인공의 서사를 도둑질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러한 흥미진진했던 소재와 이야기 전개는 뜻밖의 문제를 야기한다.
그동안 겉핥기식으로 다뤘던 '스타트업'이라는 소재를 메인 이야기로 삼은 이번 드라마는 익숙한 듯했지만 새로움 그 자체였다. 기술과 인터넷 기반의 창업 회사인 '스타트업'의 여러 이슈들과 위험성들을 잘 그려내면서, 드라마틱 한 전개로 부족할 것만 같은 소재를 나름 잘 활용해 나갔다. 여기에 20대들의 꿈과 열정 그리고 사랑까지 한대 묶으면서 청춘 드라마로서의 외관도 완벽하게 갖춰 나간다. 뿐만 아니라 IT업계의 느낌을 잘 살린 오충환 PD의 개성 넘치는 연출까지 잘 어우러지면서 비주얼적인 면에서도 흠잡을 때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스타트업'이라는 소재보다 오히려 주인공과 서브 주인공의 관계가 더 흥미로웠다. 서브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엄청난 서사를 주인공이 가로채고 이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러한 전개는 가로채는 캐릭터가 서브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박혜련 작가는 오히려 역발상적인 변주를 보여준다. 이렇게 흥미롭고도 신선한 전개는 드라마를 시청하는 동안 두 캐릭터 사이에 독특한 긴장감을 선사하면서 남다른 경쟁심리와 감정들을 공유시킨다. 이는 결과적으로 역대급 삼각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는데, 정말로 오랜만에 남자 주인공들 사이에 비등한 대립이 느껴지는 삼각관계였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매력적인 서브 주인공의 등장으로 새로운 스타 탄생을 여러 번 목격했다. <별은 내 가슴에>에서 스토리 라인까지 변경할 정도로 서브 주인공의 반란을 보여줬던 안재욱과 <가을동화>에서 발연기에도 불구하고 송승헌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보여준 원빈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드라마 제작에 있어 배우의 네임밸류와 소속사의 파워, 그리고 팬덤 등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서브 주인공이 주목받는 드라마는 찾기가 어려워졌다. 서브 주인공은 그저 서브 주인공일 뿐이었다. 그런데 <스타트업>이 오랜만에 90년대의 분위기를 재현해 냈다. 바로 한지평이라는 캐릭터의 서사와 이를 연기한 김선호 때문이다.
사실 스토리 라인 자체도 서브 주인공인 한지평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짠 내 나는 스토리였다. 보편적인 드라마라면 당연히 주인공이 맡아야 했던 서사를 서브 주인공에게 던져줬으니까. 이런 작가의 역발상으로 인한 초반부의 재미는 분명 신선했고, 비등한 두 남자주인공의 관계는 정말 재미있었다. 하지만...
한지평의 서사는 후반부까지도 남도산과 서달미의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면서, 마치 90년대 드라마처럼 극의 무게 중심마저 흔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반부의 스토리 전개는 오로지 서달미와 남도산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한지평이 가지고 있었던 서사의 무게가 너무나 컸기에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수준까지 이른다. 분명한 건 한지평이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서사는 반드시 풀어 나가야 했을 만큼 중요했음에도, 결국 이야기의 흐름에 토사구팽 당하듯 쓸모없이 버려지고 만다. 반대로 이러한 서사를 견디고 넘어서야 할 서달미와 남도산의 사랑 역시 크게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서달미와 남도산의 멜로이야기도 설득시키지 못하고, 한지평의 서사도 힘없이 무너지면서 기발했던 역발상과 역대급 삼각관계는 시청자들의 짜증만 키운 체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만다.
또 하나 아쉬웠던 건 위험성이 높은 '스타트업'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이러한 회사를 꾸려 나가는 삼산텍 멤버들에게서 간절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산텍 멤버들은 '샌드박스'가 아니더라도 다른 회사에서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고학벌의 그리고 나름 중산층의 경제력까지 가지고 있는 천재들이었다. 즉 이들에게서 반드시 결단코 성공해야 하는 이유와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청춘 드라마에서 보여주던 절박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물론 서달미를 포함한 각각의 캐릭터마다 저마다의 성공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이 '반드시'라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드라마틱 한 전개나 간절함 같은 것이 이들의 성공에 크게 작용하지 못하면서 극적 재미가 결여되는 문제를 보이고 만다.
아쉬운 부분은 깔끔한 연출과 배우들을 보는 맛으로 충분히 보상된다. 특히 <스타트업>의 젊은 배우들의 연기는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한다. 이 작품의 메인 주인공인 서달미역의 배수지는 근래 맡았던 역할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역할을 소화하면서 전작에서 보였던 이쁘기만 한 모습에서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그녀의 눈부신 외모에 더해지는 뛰어난 눈물 연기는 정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을 보여준다.
남도산 역의 남주혁은 <보건교사 안은영>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사가 하나 빠져있는 맹한 캐릭터를 무난히 연기해 낸다. 김선호는 한지평이라는 캐릭터에 절묘하게 녹아들면서 연기와 표정, 그리고 목소리 톤까지 그가 왜 이토록 몰입감을 주고 대세가 되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 낸다. 삼산텍의 배우들도 개성 강한 캐릭터들을 매력 있게 연기하면서 극의 재미를 더해준다. 무엇보다 김해숙과 김원해, 서이숙 등의 연기파 배우들은 다소 청춘 드라마스러운 작품에 무게감 있는 연기로 밸런스를 잡아준다.
<스타트업>은 사실 초반부까지만 보면 대작의 기운이 느껴졌을 정도로 놀라운 몰입감과 재미를 선사한 작품이었다. 기존 서사를 변주한 전개와 독특한 소재를 활용한 박혜련 작가의 극본도 좋았으며, 트렌드 하고 세련된 연출과 보는 재미를 더한 배우들의 연기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나름 깔끔한 마무리 덕택에 결과적으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역대급 삼각관계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설득력을 잃어버린 멜로라인의 전개가 사뭇 아쉬웠다.
어쨌든 <스타트업>은 김선호에게 <갯마을 차차차>로 인기를 보상받게 되는 교두보 같은 작품이 되었으며, 좋은 배우임을 증명한 배수지에게는 훗 날 <안나>에서 눈부신 연기를 선보이게 되는 바탕이 된다. <당신이 잠든사이>에 이어 또 한 번 좋은 호흡을 선보인 박혜련 작가와 오충환 PD는 차후 박은빈을 캐스팅하는 <무인도의 디바>로 다시 만나게 된다.
20년대 좋은 드라마들을 리뷰합니다.
위 글은 블로그에 썼던 리뷰들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