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우리영화> 리뷰
정통 멜로를 선택한 남궁민의 후속작이자 이정흠 감독의 복귀작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던 <우리영화>. 드라마신에서의 흥행불패, 심지어 연기대상과 백상까지 전부 석권한 남궁민이기에 이번 작품의 저조한 시청률은 여러 이슈와 논란을 낳았다. <우리영화>의 흥행 실패는 분명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단지 시청률만 간지고 이 작품을 평가할 수 없음을 시청한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밀도 높은 연기와 공중파에서 보기 힘든 연출로 감독과 배우들의 단호한 결의가 느껴졌던 작품, <우리영화>이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배우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찍는 감독의 사랑 이야기. 시놉시스에서 보이는 대로 이 작품의 이야기는 역시나 진부하다. 시한부와의 사랑 이야기는 이미 결말을 알고 보는 전개이며, 어쩔 수 없이 이 작품 전반에는 신파가 짙게 깔려 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영화>가 마냥 슬프고 우울하기만 한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의외로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로 드라마는 그 뻔한 결말을 향해 무던히 나아간다.
죽음과 마주하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삶의 행복을 잃지 않으려는 다음과 그런 다음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제하. 이 두 사람이 배우와 감독으로 만나 제하는 다음에게 꿈과 사랑을 채워주고, 다음은 제하에게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안겨준다. 결과적으로 그저 존경과 연민이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의 감정이 사랑으로 변해가면서, 이 작품의 당연한 비극은 조금씩 밝고 희망적으로 변해간다. 사랑하기 때문에 앞으로 헤어질 이별에 대한 비극보다, 그래서 서로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과정이 이 작품의 후반부를 가득 채운다. 이다음이 아파하는 장면을 손에 꼽을 정도로 보여주지 않은 것, <우리영화>가 신파를 극적으로 가져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밝고 희망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드라마가 진부하지만 남달라 보인 이유이다.
OTT 드라마가 범람하기 전 지상파에서 가장 파격적인 연출을 보여줬던 드라마 감독은 단연 이정흠 감독이었다. 나는 아직도 <아무도 모른다>의 그 놀라웠던 연출과 <구경이>에서 보여준 괴작의 경지를 잊지 못한다. 그런 이정흠 감독의 후속작이 시한부를 설정으로 한 정통 멜로라는 점에서 또 한 번 놀라웠다.
<우리영화>는 시한부를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이면서, 진부한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천재 감독의 고민을 담은 작품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마치 이정흠 감독의 고민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제하(남궁민)처럼 이 작품도 상업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고민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물론 이제하의 말처럼 흥행도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시청률보다는 나의 길을 가겠다는 이정흠 감독의 패기가 작품 곳곳에서 확연히 느껴진다. OTT도 아니고 시청률이 중요한 공중파 드라마에서 말이다.
'하얀사랑'이라는 영화에 주인공의 상황을 대입해서 그려내는 장면들부터 감정선을 세밀하게 잡아내는 디테일과 중간중간 무성영화 같은 느낌으로 루즈한 리듬을 깨부수는 연출까지. 다음이의 마음을 대변하는 캠코더 영상의 엔딩이나 한 곡의 경이로운 OST로 엔딩곡을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의지마저 공중파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연출이다. 180도 상하로 회전하는 키스신이나 끝이 아닌 시작임을 그려내는 이 작품의 엔딩을 보면 정말 뻔한 작품은 찍지 않겠다는 감독의 소신이 확실히 보여진다.
또 하나 재밌는 건 드라마 <우리영화>가 그 어떤 영화나 다큐멘터리보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제작사와 투자자 그리고 인터테이먼트사와의 관계, 오디션부터 스태프, 촬영에서 홍보 전략까지. 영화가 만들어지는 그 모든 과정과 영화 산업 전반의 이야기들을 그 어떤 콘텐츠보다 디테일하게 그려낸다. 한때 영화시장이 하찮게 여겨왔던 드라마라는 플랫폼에서 말이다.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궁금했던 사람들이나 이쪽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이상적인 작품도 없어 보인다.
물론 좋은 말로 이 작품의 남다름에 살을 붙이고 칭찬한다 하여도 결국 진부한 이야기와 결여된 상업성은 흥행 실패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최근 작품들에 비하여 자극적이지 않은 스토리와 느린 전개, 정통 멜로라고 하여도 진부한 소재가 이 작품의 흥행에 발목을 잡아버린다. 한마디로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재미'라는 부분이 부족했던 작품이었다. 다음이가 시한부라는 사실을 숨긴 비밀과 이를 이용하려는 투자자가 그나마 극의 드라마틱한 부분을 전담하지만, 이마저도 드라마의 담백한 기운에 조용히 묻히고 만다.
6월이라는 공개 시점도 아쉽다. 작품의 분위기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쓸쓸하고도 무거운 무드인데, 이 작품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은 날씨로 인해 이미 너무나 덥고 답답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7월 초부터 역대급 열대아가 몰려오면서 무겁고 진지한 이 작품의 온기는 시청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가을에 공개했다면 분명 더 좋은 흥행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공개 시점이 너무나 아쉽다.
배우들의 연기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채서영 역할을 똑 부러지게 그려낸 이설이나 솔직하면서 인간미 넘치는 제작사 대표를 연기한 서현우는 역시나 베테랑 다웠다. 특히 극중 조연출을 맡은 김은비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기와 발성으로 신인답지 않은 강인한 인상을 남긴다.
역시 가장 칭찬할 배우는 남궁민. <스토브리그>의 백단장과 연기가 비슷하다는 남궁민에 대한 비판도 개인적으로 크게 와닿지 않았다. 배우 특유의 '쪼'로 해석하지 않아도 남궁민은 이미 많은 배역에서 여러 변신을 보여왔고, 무엇보다 이번 작품에서 닫힌 마음을 여는 이제하의 디테일한 변화를 너무나 인상적으로 그려냈다. 자신이 어떤 연기를 보여줄 때 가장 매력적인지를 정확히 아는 배우이고, 그러한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고 연기해 내는 화면 장악력은 이번 작품에도 역시나였다. 감독 특유의 이미지를 만드는 패션이나 제스처, 그리고 말투와 눈빛까지 영락없는 이제하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흥행 배우로만 남지 않으려는 남궁민의 단호한 결의가 느껴진 연기였다.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던 건 전여빈이다. 분명 전여빈은 특유의 우울함과 밝음을 극단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남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는 배우이다. 오묘한 기운이 있고, 그러한 기운이 이다음이 '하얀 사랑'을 찍는 과정에 잘 드러난다. 제작진이 어떠한 느낌을 가지고 캐스팅했는지 알 것 같았고, 분명 연기도 훌륭했다. 하지만 묘하게도 작가가 생각한 25살의 여전히 세상이 궁금하고 보석같이 빛나는 이다음과 전여빈이 풍기는 배우의 아우라가 잘 맞아 보이지 않았다. 일부로 어린 척, 일부로 밝은 척하는 느낌이 묘하게 이질감을 만들어냈다. 차라리 병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조금더 많이 보여줬다면, 이다음의 밝은 척이 전여빈의 밝은 척과 맞아떨어져 좀 더 괜찮게 보였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아니면 캐릭터의 나이대를 서른 정도로만 했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배우가 아쉬울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 캐릭터를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어땠을까?'하는 부분이다. 전여빈의 연기는 분명 훌륭했지만,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여러 있었을 것이다. 배우의 나이와 외모를 떠나 뭔가 극본에서 그려내는 이다음의 이미지와 전여빈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그러니 자꾸만 이다음에 맞추려고 연기를 하는 '척'같은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다. 이다음의 '하얀사랑' 속 연기가 빛나 보였던 거처럼, 전여빈이 <우리영화>에서 이다음처럼 빛나 보였어야 했다.
<우리영화>는 올해 흥행가도를 달리던 SBS 금토드라마에 아쉬운 성적을 남긴 작품이다.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흥행도 분명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의 완성도가 범상치 않음을 알지만,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재미라는 부분에서 <우리영화>는 분명 아쉬웠다. 하지만 <우리영화>가 남긴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한 묵직한 질문은 분명 빠르게 소비되는 여타 드라마들과 다른 인상을 남긴다. 무엇보다 드라마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완성도의 경지를 OTT가 아닌 지상파 드라마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남궁민의 인터뷰처럼 훗날 이 작품은 그의 필모에 정말로 자랑스러운 작품으로 남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예상 가능한 결말과 흥행 실패를 안겨줬지만, 그만큼 확신했던 완성도를 증명한 드라마. 감독의 패기와 배우의 결의로 완성된 <우리영화>였다.
20년대 좋은 국내 드라마들을 리뷰합니다.
위 글은 블로그에 썼던 리뷰들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