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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스타우 Mar 11. 2023

처절한 복수, 완벽한 폐허

드라마 <더 글로리> 리뷰

김은숙 작가가 공중파의 가이드라인과 방송 심의를 벗어 재낀 OTT에서 과연 어떤 능력을 보여줄까? <더 글로리>는 그래서 궁금했던 작품이다. 이는 안길호 감독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인력들이 급격하게 모여들고 있는 OTT 시장에서 과거 드라마신을 주름잡던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어떤 시너지를 보여줄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클래스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증오를 그리움에 담아 

천천히 느리게, 그리고 처절하게

학원 폭력에 대한 복수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빠르고 직설적인 복수를 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키 비주얼인 '바둑'처럼 동은이의 복수는 조금씩 숨통을 조이듯 천천히 느리게 진행된다. 무엇보다 이 복수의 가장 큰 매력은 동은이가 직접 손대지 않는 복수라는 것이다. 전략적으로 다가가는 복수는 편을 가르고 서로를 이간질하면서, 단순하게 느껴졌던 이야기를 다양한 전개로 그려나간다. 동은이의 긴 시간 담아 온 증오를 뜨거운 사랑처럼 한 번에 소진시키지 않고 '그리움'이란 단어에 빗대어 천천히 그려나가는 이 작품의 남다른 분위기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 작품의 키 비주얼인 '바둑'처럼 동은이의 복수는~
조금씩 숨통을 조이듯 천천히 느리게 진행된다.

천천히 그려나간 동은이의 복수는 파트2에서 본격적으로 지옥불에 불을 붙인다. 그녀가 만든 지옥불에 악인들은 칼춤을 추고, 이들의 춤사위는 서로를 겨누며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파멸의 과정은 치밀하고 처절했으며, 결국 동은이의 지옥불은 연진이를 완벽한 폐허로 몰고 간다.

그동은이가 만든 지옥불에 악인들은 서로를 겨누며 칼춤을 추고, 마침내 연진이를 완벽한 폐허로 몰고 간다.


피해자에서 구원자로

지옥불을 그려내는 동은이는 예상대로 어떠한 영광도 없는 복수극을 성공시킨다. 그리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여 기나긴 복수의 여정을 끝마치려 한다. 이 지옥불의 끝에 동은이가 맞이한 건 처연하고 고독한 죽음밖에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복수의 과정에서 함께했던 피해자들의 연대는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점이 되고, 반대로 동은이는 그런 피해자들에게 구원자가 되면서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의 영광은 복수의 성공에서 오는 자기 성찰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구원자가 되어 지옥 탈출을 도와주는 메시아 같은 존재에 있었다.  

복수의 끝에 동은이가 맞이한 건 처연하고 고독한 죽음밖에 없어 보였다.
하지만 동은이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구원자가 되고, 메시아 같은 그녀의 존재는 하나의 영광이 된다


같은 듯 다른

김은숙 작가의 클래스

<더 킹>에서 겹쳐 보이는 플롯과 중복되는 캐릭터로 실망감을 줬던 김은숙 작가. <더 글로리>는 확실히 이전 김은숙 작가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신데렐라식 전개나 결국은 사랑으로 끝맺음하는 특유의 메시지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소재의 독특함으로 기발함을 줬던 부분은 퇴색되고, 오히려 다소 진부한 '학원 폭력에 대한 복수'라는 소재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복수라는 진부한 소재 안에서 김은숙 작가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앞서 말했듯이 빠른 사이다 전개와는 확연히 다른, 느리고 천천히 조여 오는 ‘전략적인 복수’라는 이야기를 선택한다.

김은숙 작가의 틀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 작품인 <더 글로리>는 진부한 복수라는 소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시킨다.

김은숙 작가의 티키타카에서 보여주는 그 주옥같은 대사들은 이 작품에선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문동은이란 캐릭터는 말수가 적고, 그녀의 대사들은 연진에 대한 편지 속 혼잣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편지글들이 김은숙 작가의 문학적 대사들은 끄집어내는데 일조한다. 신을 부정하는 듯한 동은이의 나레이션은 마치 구원을 바라는 것처럼 들려지고, 후반부 여러 인물들이 대화하는 과정들 속에서 나오는 감각적인 대사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분명한건 OTT라는 자유도가 보장된 플랫폼에서 그려지는 인물들의 성격이나 묘사, 그리고 각종 표현들에서 맘껏 능력을 열어 보이는 김은숙 작가의 클래스가 확연히 느껴진다는 것이다. 종교적 표현과 명품 브랜드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작가의 센스와 문학적 접근마저 느껴지고, 특히 'GQ 1월호 17페이지'같은 몇몇 브랜드를 다루는 대사들은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는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인물들의 성격이나 묘사, 그리고 각종 표현들에서 맘껏 능력을 선보이는 김은숙 작가!!
무엇보다도 문학적 느낌마저 나는, 맛깔나는 김은숙 작가의 대사들이 정말 일품이었다!!!


잘하는 것을 잘한 

안길호 감독

사실 안길호 감독은 <비밀의 숲>이 아니라 <왓쳐>에서 스릴러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연출적 경지를 보여줬었다. 결국 <더 글로리>는 그가 잘하는 것을 잘한 정도이다. 무엇보다 김은숙 작가가 새롭게 그려낸 배경들을 제대로 살려내면서, 이전 김은숙 작가의 컬러를 비주얼적으로 상당 부분 걷어낸 것이 이번 작품의 가장 큰 수확이다. 하나씩 먹어가는 바둑을 키 비주얼로 삼은 연출과 차가운 새벽의 안개 같은 느낌을 작품 전반에 깔아 놓은 분위기도 상당히 맘에 들었다. 느린 전개 안에서도 박진감 넘치는 편집과 음향 효과,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 결을 제대로 살려내는 카메라 워킹까지 역시 안길호 감독이란 생각을 들게 만든다. 특히 역설적으로 복수의 과정을 영광에 비유한 '팡파르' 느낌의 음악 선곡은 정말 일품이었다.

연출적인 부분에서 <더 글로리>는 안길호PD의 역량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

어둠을 그리는 송혜교 !!

캐릭터는 그 누구 하나 버릴 것 없이 완벽하게 살아있고, 개성 넘치는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 마저 완벽에 가까운 캐스팅을 보이면서, 연기를 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특히 똑 부러지는 연기에서 강점을 보이는 송혜교가 냉소를 넘어 증오의 삶을 그리는 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웃는 모습이 가장 이쁘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서 그 모습까지 앗아간 동은이의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연기하면서, 송혜교의 그늘진 모습을 제대로 선사해 준다. 오글거릴 수도 있는 대사들도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며, 무엇보다 영양실조와 피폐한 동은이의 모습을 생기 하나 없는 주름진 얼굴로 연기한 송혜교의 자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냉소를 넘어 증오의 삶을 그리는 송혜교의 어두운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차갑게 가라앉은 분노를 조금씩 꺼내 올리는 주여정을 연기한 이도현부터 개성 강한 캐릭터들에게 완벽한 생명을 불어넣었던 염혜란과 박성훈, 정성일과 김히어라, 그리고 차주영까지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이보다 더 이상적일 수 없었다. 특히 동은이의 아역을 연기한 정지소의 연기는 이 작품의 서사와 개연성을 제대로 완성해 준다. 

정지소의 인상적인 아역 연기가 이 작품의 서사를 제대로 완성해 준다.

그 누구보다도 칭찬해 주고 싶은 건 임지연이다. 감정에 요동치며 흔들리는 모습들을 즉각 즉각 얼굴에 드러내는 표정연기가 정말로 일품이었다. 무엇보다 감정에 반응하여 얼굴이 일그러지는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이러한 연기가 테크닉인지 아니면 인물에 몰입한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신들려 보였다. 임지연은 확실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느낌이다.  

감정에 요동치며 흔들리는 모습들을 얼굴로 표현해 내는 연기가 너무나 일품이었던 임지연.


결국 지옥불에서 칼춤 추지 않은 동은이

그래도 아쉬운 부분을 찾는다면 역시 직접적인 복수에 오는 가슴 뚫리는 사이다 장면이 마지막까지 없었다는 것이다. 지옥불에서 직접 칼춤을 추지 않은 동은이는 마지막까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며, 이는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느낄만한 통쾌한 한방이 부족했던 이유였다. 지옥불에서 문동은과 주여정의 칼춤을 기대했다면 분명 실망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심지어 칼춤 대신 로맨스 한 스푼을 집어넣은 건, 나쁘진 않았지만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러한 복수의 톤 앤 매너를 끝까지 끌고 간 작가의 아집에 감탄했으며, 무엇보다 아이를 건드리지 않고 그려낸 이 작품의 복수극에 더없는 찬사를 보낸다. 

지옥불에서 직접 칼춤을 추지 않은 동은이는 마지막까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이는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느낄만한 통쾌한 한방이 부족했던 이유였다.




더 글로리 (2023. NETFLIX)

<더 글로리>의 강점은 역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뤄지는 완벽한 복수극에 있다. 여기에 살아 숨 쉬는 캐릭터들과 이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 연기자들, 그리고 작가와 배우의 의도를 정확히 캐치하여 보여준 놀라운 연출력도 한 몫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진짜 강점은 역시 학원 폭력에 대한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메시지이다.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며 지옥에서 살고 있는 학폭의 피해자들, 그리고 이를 잊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가해자들. 이들의 비교를 통해 학폭 피해자들의 지옥을 제대로 그려내면서, 우리 사회에 이들에 대한 관심과 경각심을 제대로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대중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낸 스타 작가가 그려냈다는 데서 더 놀라운 것이다.








20년대 좋은 드라마들을 리뷰합니다.

위 글은 블로그에 썼던 리뷰들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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