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안나> 리뷰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시리즈 <안나>는 신분을 속이고 상류사회에서 거짓된 삶을 사는 유미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작품이다. 이미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뤘던 리플리 이야기를 또 한 번 반복하는 <안나>는 스토리 면에서는 다소 기시감이 드는 작품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려내는 욕망으로 점철된 거진 된 삶은 그 어떤 작품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오묘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다. 그리고 이 묘한 기운의 중심에는 놀라운 연출과 유미와 안나를 연기한 수지가 있다.
남의 인생을 훔쳐 사는 이 작품의 전반적인 스토리는 마치 잘 다듬은 막장 드라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나>를 감상하다 보면 막장 드라마보다 오히려 상류층과 하류층의 이질적 만남을 그려낸 봉준호 감독의 걸작 <기생충>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삶을 안나와 유미를 통해 비교하면서, 그들의 삶을 신날 하게 드러내고 위트 있게 풍자해 나간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기생충>에서 다루지 못했던 상류층 삶의 불안한 내면까지 그려내면서, 이 두 부류의 본질적인 삶의 무게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안나>는 뻔한 리플리 이야기를 상당히 영리하게 풀어낸다. 이 작품은 거짓된 삶을 사는 유미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그리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이 작품의 서스펜스를 만들기는 하지만 <안나>는 이보다 인물의 감정 변화에 더 큰 중점을 둔다. 왜 유미가 안나가 되려 했는지, 십대시절 부터 이어진 그녀의 불운과 능력이 있음에도 인정받지 못했던 그녀의 청춘에서부터 그 변화를 심도 있게 그려 나간다. 그러한 디테일한 심리 변화는 그녀에 대한 묘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상류층 인생을 살면서도 서서히 무너지는 유미의 감정에서 또 다른 유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든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유미와 안나를 연기한 수지이다. 이전 <스타트업>과 <베가본드>를 시청할때도 느꼈지만, 수지가 연기를 못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압도적인 비주얼에 연기가 가리는 부분도 있었고, 배역 자체가 너무나 보편적인 캐릭터만 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그녀가 30대의 길목에서 선택한 선택한 <안나>는 마치 그녀를 위해 준비된 작품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능력과 재능에 비해 눈부신 외모와 아이돌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던 수지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측은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든다.
우리가 그동안 궁금해 왔던 그리고 보지 못했던 수지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10대부터 30대 후반까지 이어지는 인물의 변화를 완벽하게 그려나간다. 나태하고 무력한 유미의 감정 안에서 욕망이 꿈틀거리는 안나의 감정들을 기가 막히게 끄집어내면서, 이 드라마를 온전히 자신의 연기력으로 장악해 나간다.
극본과 감독을 동시에 맡은 이주영 감독이 그려내는 이 작품의 디테일은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유려하게 화면으로 풀어놓은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감독이 그려낸 이 작품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특유의 톤 앤 매너를 잃지 않으면서 유려하게 그려나간다.
엘리베이터와 계단, 하이힐 구두와 고층 아파트의 뷰에서 드러낸 높고 낮음의 비주얼 포인트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클래식 음악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드라마의 리듬감과 우아함을 살리는 연출도 일품이다. 문득 내가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인지 잘 만든 단편 영화 여러 편을 보고 있는지 착각하게 만들 정도이다.
이 작품이 그려낸 상류사회의 비주얼적인 묘사는 2021년 작품인 <마인>에 버금가는 수준을 보여준다. 디테일한 인테리어와 소품, 화려하면서도 매력적인 의상, 그리고 이를 더욱 아름답게 보여준 화면 구성과 조명까지! 완벽한 비주얼을 위해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신경 쓴 제작진의 노력이 엿보인다. 무엇보다 OTT드라마의 강점을 잘 살린 명품 브랜드의 노출과 수지의 화려한 의상들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눈요기적 재미를 준다.
칭찬만 했지만 <안나> 역시 아쉬운 부분이 있다. 감독판이 따로 있을 만큼 후반부 서사가 다소 부족하단 인상을 받게 된다. 안나와 최지훈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유미가 무너짐과 동시에 왜 죄의식을 갖게 되는지에 대한 서사가 부족해 보였다. 반대로 감독판은 부족했던 서사를 채워서 인물들의 감정선을 유지하는 대신, 원판의 긴장감과 리듬감을 잃어버리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논란이 되었던 감독판이었지만, 어쨌든 두 작품 모두 단점이 뚜렷해서 어느 작품이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려워 보인다.
<안나>는 뻔한 이야기임에도 올해 드라마 중에서 가장 많은 긴장감을 선사 한 작품이다. 그만큼 오묘한 기운을 선사했던 이 작품의 놀라운 완성도는 이주영 감독의 디테일한 연출과 극본이 있었기에 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자신의 벽을 깨부수기 위해 마치 유미처럼 모든 것을 내던졌던 수지의 도전이 이 작품을 더욱더 빛나게 만든다. '나는 마음먹은 건 다 해요'라는 유미의 이야기는 마치 수지의 이야기처럼 들릴 정도로 말이다. 2022년의 수작이자 또 하나의 걸작이다.
20년대 좋은 국내 드라마들을 리뷰합니다.
위 글은 블로그에 썼던 리뷰들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