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표 떡만둣국
어린 시절 설 명절 전이면 엄마 따라 떡 방앗간에 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이로 하얀 가래떡이 줄줄이 나오는 게 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보곤 했다. 북적대던 방앗간에서 길게 뽑은 가래떡을 엄마는 싹둑 한 입 크기로 잘라 꿀이랑 주셨다. 한입 물면 말랑말랑 가래떡의 쫄깃함에 홀딱 반했다. 그날 저녁이나 하루 이틀 뒤에 엄마는 바구니 가득 들은 가래떡을 죽죽 뜯어서 늦은 시간까지 도마에서 썰었다. 엄마 옆에서 한 개씩 쏙쏙 입에 넣으며 자르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몇 가닥은 그대로 남겨두고 긴긴 겨울 입이 심심한 날이면 노릇노릇 구워주기도 하셨다. 지금이야 마트에서 쉽게 구하는 가래떡이지만 어린 시절 엄마랑 방앗간에서 본모습은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얼마 전에 친정에 다녀온 언니가 집에 잠시 들렀다.
"형부랑 시댁에 볼일 있어 내려갔다가 집에 다녀왔어. 엄마가 가래떡을 뽑아 놓으셨다며 챙겨주시더라, 코로나 때문에 왕래가 힘들 거 같아서 마음 쓰신 것 같아"
" 우와 얼마 만에 엄마표 가래떡이야. 먹음직스러운데"
" 에어 프라이기에 돌려서 출출할 때 먹었더니 옛날 어릴 때 엄마가 구워주던 가래떡이 생각나더라고"
" 에어프라이로 요즘 많이들 해 먹던데 가래떡도 가능한가 보네. 암튼 잘 먹을게. 고마워"
" 혹시 구워 먹기 그러면 어슷 썰어서 냉동실에 뒀다가 떡국 해 먹어. 파는 거랑은 다른 맛이야. 좀 더 속이 든든하다고 해야 하나?"
" 오키. 알았어"
일 년에 두 번은 온 가족이 고향 방문을 한다. 시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만 친정이 지척이라 하루는 꼭 친정에서 하룻밤을 잔다. 친정엄마랑 수다도 떨고 엄마가 해준 집 밥도 먹고. 남편이나 아이들도 으레 그러려니 하곤 언제 갈 건지 미리 계획을 짠다. 언니도 서울에 살고 오빠는 외국에 나가 있으니 친정 부모님은 명절 때면 막내딸 네 가족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이면 언제 내려오냐며 전화를 주신다.
추석, 설 명절 음식이 지겨워질 즈음 친정을 방문하니 엄마는 좀 색다른 걸 만든다며 미리 사골을 고아 놓으신다. 푹 끓인 사골에 고기를 찢어 놓으시고 거기에다 가래떡이랑 만두까지. 성당에서도 우리 농산물 판매가 이루어지는데 엄마는 성당에서 파는 만두를 주로 이용하신다. 시중에 파는 물만두보다는 크기가 크고 왕만두보다는 작은 아주 적당한 크기에 속이 꽉 찬 복주머니를 연상시킨다. 삼삼하게 소금으로 간을 보고는 파를 숭숭 썰어 넣고 파르르 끓인 뒤에 면기에 친정 아빠 거부터 사위, 두 손녀딸, 내 거 마지막으로 엄마 거까지 덜어낸다. 쟁반에 하나씩 놓으면 엄마는 김가루를 뿌려주신다. 엄마가 담근 배추김치에 명절에 만든 채소들이랑 한 숟갈 수북이 떠서 입안에 넣으면 세상 행복하다.
명절이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 가끔 장바구니에 떡국이랑 김치만두를 넣는다. 아이들이나 남편이 가끔 찾기도 하고 특별히 반찬거리가 없을 때 딱이다. 며칠 전 언니가 가져다준 엄마표 가래떡으로 떡만둣국을 만들었다. 나는 주로 멸치 국물을 베이스로 만든다. 다시 멸치, 다시마, 마른 표고버섯을 넣고 한소끔 국물을 우려낸다. 그사이 떡국 떡은 물에 한번 씻어 체에 밭쳐 둔다. 냉동실에 있던 김치만두도 꺼내놓는다. 냉장실에서 애호박을 꺼내어 채 썰고 다용도 실에서 양파를 꺼내와 다듬고 씻은 후 가늘게 칼질을 쓱싹한다. 프라이팬을 꺼내 가열하는 동안 계란을 꺼내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하고는 각각 얇게 지단을 부친다. 지단을 부치고 식힌 후에 썰어야 한다. 뜨거울 때 썰면 얇게 자르기도 쉽지 않고 자꾸 부서져 모양이 이쁘지 않다. 한김을 뺀 후라야 원하는 두께로 지단을 자를 수 있다.
어느새 냄비 가득 다시 국물의 진한 냄새가 코끝에 느껴진다. 뚜껑을 열고는 건더기를 건져내고 통통하게 불은 표고버섯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꼭지를 떼어내고 가늘게 채 썬다. 노르스름하니 맑은 다시 국물에 썰어놓은 야채와 떡을 넣는다. 한번 파르르 끓으면 그때 만두를 집어넣는다. 네 가족이니 한 사람한테 두 개씩. 김을 준비해서 가위로 잘게 썰어 통에 담아 둔다. 김장김치를 잘라서 가지런히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려둔다. 한소끔 끓은 떡국의 간을 맞출 차례. 국간장과 소금 약간을 넣고 맛을 본다. 준비해 놓은 그릇에 국자로 담아내고는 흰색, 노란색 계란 지단과 김가루를 듬뿍 뿌려서 내놓는다.
온 가족이 함께 떡만둣국 한 그릇 하며 아이들과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평소 가래떡이랑 좀 다른 것 같은데" 남편이 한 술 뜨더니 말했다.
"어 언니가 며칠 전에 가져다준 엄마가 뽑은 가래떡으로 만든 거야"
" 어쩐지 도톰하니 파는 거랑 좀 다른 것 같더라니"
" 얘들아? 외할머니 하면 기억나는 게 뭐 있어?"
" 명절 때 할머니네 거실에서 큰 상을 펴고 아빠 다리를 하고 먹는 떡만둣국이요. 할머니가 만든 오징어 구이랑 할머니표 김치랑. 난 그게 기억이 나요"
" 오호 할머니 음식이 입에 맞았나 보네. 엄마도 할아버지 할머니랑 얼굴 보며 먹는 떡만둣국이 참 맛있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엄마 어렸을 때 할머니 따라 방앗간 간 적 있거든. 설 명절 전 방앗간은 북적북적했어. 할머니가 코로나로 우리 못 가니까 일부러 가래떡을 뽑으신 것 같아"
"우리 할머니 짱!"
코로나로 이번 설날에 외할머니표 떡만둣국을 아이들과 함께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엄마의 정성 가득한 떡만둣국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조금 남겨둔 가래떡을 에어 프라이기에 구워서 아이들에게 맛을 보여줘야겠다. 어린 시절 엄마가 나에게 간식으로 챙겨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