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첫 사회생활 적응기 3

by 꽁스땅스

첫 회사에서 3년 정도 되었을 때 우리 부서 재무이사님의 퇴사 소식을 들었다. 이미 후임자분이 결정되어 며칠 인수인계 작업을 하셨다.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 처음으로 업무에 대한 큰 그림을 알려주신 분이고 이제는 혼자 헤쳐나가야 되는 상황이라 생각하니 더 가슴이 아팠다. 사장님과 다른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 그동안 고마웠어요.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 될 거예요, 또 봅시다!" 내 앞에 오시더니 악수를 청하시며 말씀하셨다. " 네 감사했어요 이사님"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해 드리고 자리로 왔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부서 이사님, 과장님, 다른 부서 동료분이 눈치를 못 채도록 얼른 휴지로 닦고 할 일에 집중했다.


새 이사님은 이상하게도 어렵게 느껴졌다. 일하는 모습이 거침없었고 회의 때가 아니면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가끔 업무 때문에 얘기할 기회가 생길 때면 긴장이 되었다. 회사일이 조금씩 익숙해지니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퇴근 후나 주말에 어학연수를 알아봤다. 그동안 모아둔 월급으로 더 경력을 이어가기 전에 부족한 언어 실력도 쌓고 새로운 경험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직하신 이사님의 전화를 받았다. 마침 외부 교육이 있는 날. 이사님 회사 근처가 교육 장소라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셨다.


이사님이 떠나시고 6개월 정도 지난 시점에 역삼역 근처 식당에서 이사님을 뵈었다. 안부를 물으시고 어떤 교육을 받냐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사님이 옮긴 회사가 미국 반도체 회사인데 부서 직원이 필요하다 시며 함께 일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실무능력을 익히며 배워도 언어는 조금만 노력하면 자연스레 늘게 된다고. 고민해보고 연락을 달라는 말씀을 주시고 헤어졌다.


식물들은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할 때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랩 걸 Lab Girl> p276


이사님의 제안이 고마웠다. 첫 회사에서 사회 초년생인 나의 넋두리를 진지하게 들어주시고 업무에 있어서도 회계의 한 사이클을 경험하게 해 주셨는데 이직의 기회까지 주시다니. 어학연수 책자를 들여다보며 며칠 생각에 잠겼다. 결혼한 언니 집에서 지냈던 때라 형부와 언니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첫 회사에서 닻을 내려 작은 식물로 자라는데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데는 이사님의 도움이 컸다. 그분을 신뢰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연수를 접고 이직 결정을 내렸다.


눈 속에서 사는 식물들에게 겨울은 여행이다. 식물은 우리처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여행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식물은 장소를 이동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가건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뎌내면서 시간을 통한 여행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은 긴 여행이다. 나무들은 오지를 긴 시간 여행하는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조언과 똑같은 조언을 따른다. 짐을 단단히 싸라는 조언 말이다. <랩 걸 Lab Girl> p274


이사님께 답변을 드리니 아시아 재무총괄 디렉터와 전화 인터뷰를 해야 하니 미리 준비를 좀 하라고 하셨다. 며칠 후 회사로 갔고 이사님 방에서 스피커폰으로 인터뷰를 했다. 간단히 업무를 바탕으로 한 자기소개를 한 뒤 영문과 부전공을 했다고 하니 기억에 남는 영문학 작품과 그 이유를 물었다. 부전공이라고 하기엔 회사 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학점 따기 쉬운 과목 위주로 공부를 했건만. 순간 당황했지만 필수적으로 들어야 했던 영문학 시간에 폭풍의 언덕을 공부한 게 기억이 나서 대충 말을 만들어 답변을 했다. 이사님과 함께 일한 적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어서인지 인터뷰 말미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잘 끝냈다. 다행히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첫 회사에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첫 회사를 떠나며 그동안의 일들이 떠올랐다. 회계의 대변 차변도 가끔은 헷갈려하고 영문 계정과목에 적응하느라 엉뚱하게 처리하기도 하고 회사 규정에 맞는 경비처리를 위해 눈에 불을 켜고 확인했던 일들. 처음 재무제표를 작성하고 수십 개 되는 부속 보고서를 만들면서 야근했던 일들. 학교에서 배운 전공이 실무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경험한 곳. 사회 초년생의 어수룩한 때를 아주 쪼금 벗을 수 있었던 곳. 책 < 랩 걸>에서 "삶과 사랑은 버터와 같아서 둘 다 보존이 되질 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했다. 또 다른 곳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나는 멈추지 않고 새로운 문을 그 뒤로도 계속 두드렸다.


우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문을 두드리는 것도 멈추지 않았고, 언젠가는 그 문이 열리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랩 걸 Lab Girl>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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