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로즈마리 아킬라나
책 < 일하는 마음>에서 예전에 매체에서 접했던 한 사건이 나온다. 그 사건을 통해서 그래도 아직은 이 세상에 자기 자리에서 바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에 잠시나마 마음이 따뜻해졌던 생각이 나서 오늘 소개할까 한다.
고통은 여기에 두고 가세요. 그리고 세상에 나가 당신의 근사한 일들을 하세요
<일하는 마음> p226
30여 년 동안 최소 156명의 어린 선수들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러온 래리 나사르에게 최고 175년형을 선고한 판사 로즈마리 아킬리나가 법정에서 증언한 피해자들에게 건넨 말이다. 래리 나사르는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및 미시간 대학교 팀 닥터였다. 어린 선수들은 자신이 당한 일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고, 십수 년 넘게 혼란과 자책으로 고통받아왔다. 그러나 물꼬가 터지자 서로가 서로를 발견했고 비로소 " 그것은 성범죄였다"라고 함께 입을 모아 말할 힘을 얻었다.
아킬라나 판사는 발언하고 싶어 하는 모든 피해자에게 법정의 문을 열어주었으며, 원하는 만큼 길게 증언할 시간을 주었다. 거기에 더해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증인 한 명 한 명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며 일일이 위로와 감사, 칭찬과 격려를 건넸다.
언제나 냉정하고 공평무사하기를 요구받는 판사가 마치 피해자들의 치유자인 양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가해자를 향해 분노를 드러낸 것은 얼핏 부적절한 일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자리는 이미 유죄 판결이 내려진 후의 양형심리 자리로 배심원들은 배석하지 않았다. 더구나 나사르는 이미 불법 성인물 관련 범죄로 징역 60년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법적 절차의 관점에서 보면 나흘에 걸려 150명이 넘는 이들의 발언을 듣는 것은 무용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킬라나는 판사의 공식적 역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법적 판단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법적 판결 이상으로 위로와 응징의 말을 건넴으로써 이 사건을 하나의 역사적 전기로 만들었다. 아킬라나가 귀 기울임으로써 사회가 함께 귀를 기울였고 온 세계가 들었다.
선수들이 고통을 당하는 동안 용기를 내 그의 범죄를 고발한 피해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 체조 협회, 미시간 대학, 미국 올림픽위원회 등의 관련 기구들은 선수들의 호소를 매번 외면했다. 아킬라나 판사가 법정에서 한 행위 하나하나가 미국 사회 전체가 이 권력기구가 저질러온 잘못을 뒤늦게나마 인식했음을, 그리고 이제라도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음을 상징했다. 아킬라나 판사의 위로는 그 법정에 선 피해자 개인들뿐 아니라 비슷한 위치에 있었거나 그렇게 될까 봐 공포를 느끼는 모든 약자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아킬라나 판사의 분노는 래리 나사르 개인을 단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슷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잠재적 가해자들과 그런 범죄에 무관심했던 권력자들을 향한 경고였을 것이다. 아킬라나의 판결이 있은 후 미시간 대학 총장과 미국 체조 협회 이사진 전체가 사퇴했다. 2018년 1월 미국 사회는 래리 나사르의 범죄를 30여 년 만에 단죄하게 되었다.
권위는 이렇게 행사하는 것이다. 자신이 행사하는 권위의 상징적 무게를 이해하고, 안일하게 둘러쳐 있던 테두리를 필요한 순간에 딱 한 걸음 넘어서 주는 것. <일하는 마음> p228
저자는 아킬라나 판사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고 그가 한 말이 바다 건너 이 땅의 여성들에게도 힘을 주었다고 했다. 가해자에게 먼저 공감하고 그의 '홧김'을 이해하며 가해자의 망가진 인생과 잃게 될 기회에만 주목하는 판결을 숱하게 보아온 한국의 피해자와 약자들에게, 언제 가는 우리에게도 저런 역사적 순간이 올지 모른다는 희망을 주었다는 것이다. 가해자를 어떤 경우에도 용서해선 안되다거나 모든 선처가 합리하다는 말이 아니라고. 먼저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피해자의 깊은 상처와 이미 잃어버린 기회에 주목하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준 것. 그런 다음 이루어지는 선처만이 가해자에게 유달리 공감하는 판사 개인의 권위 남용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용서라는 것이다.
2018년 1월 래리 나사르에 대한 판결이 날 무렵 뉴스에서는 서지현 검사가 8년간 고통을 딛고 용기 있는 증언을 내놓았다. 그 뒤 빙상계 심석희 선수에 대한 기사부터 시작하여 예술계에서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어느 개인, 조직(또는 제도), 관념이 사회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그 사회의 성원들에게 널리 인정되는 영향력을 지닐 경우, 이 영향력을 권위라고 부른다. 따라서 권위는 이것을 느끼고 인정하는 데서 성립하는 정신적인 것이다"(네이버 사전)라고 되어 있다.
아킬라나 판사는 본인의 역할을 통해 필요한 순간의 한 걸음을 내딛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올바른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권위를 내세워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권위적인 태도가 아니라 피해자들에게 주목하고 공감과 위로를 해 주어 진정한 용서, 마음의 치유도 함께 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말한 대로 우리에게도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명해 주는 올바른 권위가 세워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