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라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한다. 외할머니가 집에 머무르셨을 때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현관문 밖 차 소리와 부엌에서 할머니가 설거지하는 소리만 들리고 가족들 인기척이 없었다. 공무원인 아빠, 고등학생 언니, 중학생 오빠는 이미 출근. 등교를 했을 것이고 새벽부터 엄마는 과수원을 가셨으리라. 초딩생인 내가 깨면 할머닌 아침밥을 챙겨주시려고 기다리셨을 거다. 할머니가 주무셨던 이불은 이미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었고 내 입은 피노키오 코처럼 길게 나온 채로 할머니에게로 갔다.
"할머니, 엄마는?" " 과수원 갔지, 배고프지 얼른 밥 먹고 학교 가자" "힝, 나 밥 먹기 싫어. 그냥 세수하고 학교 갈래"밥을 푸다 말고 할머니가 내 표정을 살피셨다. " 우리 마리아 오늘 기분이 별로인가 보네, 잠을 잘 못 잤나, 우리 강아지" 고개만 좌우로 흔들고 방으로 오는 나를 따라오신다. " 무슨 일인데 할머니한테 얘기해보자" 침묵 끝의 나는 너무 서러워 눈물을 뚝뚝 흘렸다. " 며칠 전부터 내 생일이 얼마 안 남았다고 아빠랑 엄마한테 얘기했어. 둘 다 너무 바쁘니까 잊어버리지 말라고. 오늘 내 생일인데 엄마도 없고 미역국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계란 프라이도 없고"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할머니는 나를 꼬옥 안아주시며 등을 토닥이신다. " 그랬구나. 오늘 우리 강아지 생일이었어. 아빠는 회사일로 바쁘고 우리 마리아가 자고 있으니 저녁에 와서 축하해 주시려 했을 거고. 엄만 오늘 과수원에 비료를 해야 해서 아침 일찍 나가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을 거야. 할머니가 우리 강아지 좋아하는 라면 끓여줄까? 계란 풀어서 맛있게!" 서러워 눈물을 흘리던 나는 할머니의 뜻밖의 제안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갈 가방을 싸고 준비를 마칠 즈음 할머니는 밥상을 들고 방으로 오셨다. 밥상에는 면기에 계란과 함께 먹음직스러운 라면과 밥 약간, 김치, 김이 올려져 있었다. 엄마는 라면을 자주 사다 놓지는 않으셨다. 세끼 밥을 제외하고 간식으로 농사지은 고구마, 감자 정도 부엌 찬장에 놓아두셨다. 어쩌다 아주 가끔 사다 놓은 라면은 언니랑 오빠랑 같이 있을 때만 함께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라면을 호로록 한 젓가락씩 입으로 가져갈 때마다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나를 위해 특별히 끓여준 계란 넣은 라면은 어린 나에게 여태껏 먹은 그 어떤 라면보다도 빈속을 덥혀주고 마음 또한 따뜻하게 해 주었다. 어리광 부리던 나를 받아주시고 라면 먹는 나를 보며 흡족해하시던 할머니의 표정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