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는 깨달음의 계기다
영화관에 처음 가 본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것도 시험이 끝난 날 학년 전체 단체관람이었고 내 생애 첫 영화는 <외계인 ET>였다. 지구밖에 사는 생명체(외계인)와 어린이의 교류를 그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걸작. 안방에서 주말의 명화로만 보던 나는 대형 스크린에 친구들과 함께 영화관을 경험한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 이후 친한 친구와 시간만 나면 자주 영화관을 찾았고 어떤 날은 연속 두 편을 보기도 했다.
잠시 영화 소개를 하자면 지구를 탐사하러 왔다가 홀로 지구에 남겨진 외계인과 그를 몰래 숨겨주고 어떻게든 우주로 돌려보내려는 아이들의 우정을 그린다. 그들의 적으로 그려진 지구인 어른들은 이 외계인을 어떻게 해서든 붙잡아 연구소재로 이용하려고 아이들을 뒤쫓지만 아이들은 어른의 포위망을 벗어나고 외계인은 자신을 데리러 온 우주선을 무사히 찾아 지구를 떠나간다.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의 저자는 이 영화에서 이상한 점이 있다고 한다. 바로 어른의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이를 때까지 화면에 나오는 모습은 철저하게 아이들과 외계인의 얼굴뿐이고 어른의 얼굴은 주인공인 엘리엇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거의 화면에 나오지 않는단다. 즉 이 영화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타자'로 그려져 있다는 거다. 물론 등장인물이 어린이들뿐이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외계인을 어떻게든 자신의 별로 되돌려 보내주려는 아이들과 외계인을 포획해 연구 대상으로 삼으려는 어른들의 대결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어른이 등장한다.
그런데도 적인 어른들의 얼굴은 화면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다. 어른의 얼굴이 화면에 비치는가 싶으면 부자연스럽게도 허리부터 상체가 화면에서 잘려 있거나 때로는 방사능을 막기 위해(서라고 생각되는) 헬멧을 쓰고 있어서 항상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이처럼 <이티>에서는 얼굴이라는 이해 가능성의 매개체가 교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글자 그대로 자신 이외의 사람이 아니라 '소통이 안 되는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뜻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의 타자를 알기 쉽게 표현하면 바로 바보의 벽이 가로막고 있어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알기 쉽게 타자를 '좀처럼 알 수 없는 상대'라고 이해하면 될 거라 말한다.
저자 야마구치 슈는 20세기 후반에 '타자론他者論'이 철학의 중요한 논점으로 부상한 것에는 필연성이 있다고 했다. 철학은 세계와 인간의 본성을 고찰하는 행위인데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 넣으며 고찰을 거듭해 왔는데도 아직도 '이것이다!'라고 확정되지 않은 것에 대한 답은 명백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답이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제안과 부정이 되풀이되고 영원히 완전한 합의에 다다르지 못할 것 같은 이 행위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라는 존재의 부상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타인'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부정적인 뜻을 품고 있지만 그럼에도 레비나스는 끊임없이 타자의 중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논했다. 서먹한 상대, 소통이 안 되는 타자가 왜 중요한 것일까? 레비나스는 이에 대해 간단히 답했다.
타자는 깨달음의 계기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p162>
자기 시점에서 세상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타자에 의한 세상의 이해와는 다른다. 물론 타자의 견해를 '네 생각은 틀렸어'라며 부정할 수도 있다. 저자는 실제로 인류에게 일어난 비극의 대부분이 자신은 옳고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는 틀렸다고 단정한 데서 야기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른 타자를 배움과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와 다른 관점의 가치관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p162~163>
레비나스 역시 자신의 스승인 슈샤니 옹과 제자인 자신과의 관계에서 세계를 보는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저자 역시 작곡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에는 스승이 주의를 줘도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정확히 스승의 말 자체는 알 듯했으나 진정한 속 뜻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몰랐던 것을 어느새 문득 알게 되었다는 거다. 한번 지나간 일은 다시 체험할 수가 없지만 어쨌든 어제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왠지 모르지만 오늘은 '알게 되고'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히토쓰바시 대학교의 학장을 지낸 역사학자 아베 긴야 교수는 그의 책 <내 안에서 역사를 읽다>를 통해 지도 교수였던 우에하라 센로쿠 교수의 가르침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교수님은 항상 학생이 보고를 하면 "그래서 과연 무엇을 알게 되었나요?"라고 물으셨다..... 교수님은 언젠가 "안다는 것은 그것에 의해 자신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라고 말씀하셨다. 이 또한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p164>
알지 못하는 사람, 즉 타자와의 만남은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해후가 가져다주는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의 철학의 핵심 개념인 '얼굴'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은 문단에서 누차 강조했다고 한다.
인간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지어다!'하고 표현하는 '얼굴'의 개념만은 자기만족을 느끼는 동안에도 혹은 우리의 능력을 시험하는 장애를 겪는 동안에도 회귀하지 않는다. 이는 현실적으로 죽이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죽일 수 있는 것은 타자의 얼굴을 응시하지 않는 경우뿐이다.
<에비뉘엘 레비나스, 곤란의 자유 Difficile liberte>
몇 번을 읽었는데도 이해가 될 듯 말 듯 난해하다. 다행히 저자가 레비나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해 준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와의 관계라 하더라도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이해의 가능성을 교환하고 이로써 관계성을 파괴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영화 ET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결국 어른의 얼굴은 영화 후반의 클라이맥스에 가서야 등장한다. 거의 죽게 된 외계인을 구하기 위해 어른들과 아이들이 협력하는 장면에 이르러 비로소 어른들은 헬멧을 벗고 주인공 엘리엇 남매들과 서로 '얼굴'을 마주한다. 레비나스의 난해한 문장의 메시지를 넌지시 전하는 영화의 한 예라는 저자의 말이 조금은 납득이 되었다.
레비나스가 주장한 '타자'의 개념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회사 내에서의 이메일 소통이 떠올랐다. 조직이 비대해지고 환경적인 제약으로 근무 공간이 달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의견을 교환할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이메일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벼운 주제나 일에 대해서는 이메일 소통이 간편하긴 하다. 하지만 어떤 경우 이메일만으로는 맥락이나 보내는 사람의 의도를 잘못 오해하여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 경우도 있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하면 더 신속하게 끝날 일이 이메일로 주거니 받거니 각자의 얘기만을 해서 일의 진척이 더뎌지기도 한다. 특히나 요즘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를 하고 아이들 또한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다 보니 대면 수업의 소중함을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다. 특히나 서먹한 상대나 이해가 안 되는 타자와의 관계인 경우 얼굴을 마주하여 대화를 계속해 나가려는 노력이 한 개인으로서나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필요함을 새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