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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17. 2017

어제보다 가까이

여자는 자꾸만 넘어졌고, 남자는 그때마다 여자를 붙잡았다

  남자는 오늘 여자와 말을 놓을 수 있길 기대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존댓말을 썼고, 몇 번을 만났지만 늘 긴장한 모습이었다. 얼마 전, 데이트 중에 여자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고, 여자는 아주 짧게 전화를 마쳤는데 남자와 대화를 할 때보다 더 발랄한 분위기였다. 남자가 질투 섞인 말투로 누구냐고 물으니 다음 달에 결혼하는 대학 동창이라고 말했다. 차마 자신에게는 왜 그렇게 편하게 대하지 못하냐고 물을 수 없어 결혼식에 같이 가도 되냐고 물었다. 여자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친구들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건 처음이라고 하면서 살짝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오늘 남자에게 친하게 오빠라고 부르겠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4살 많은 남자에게 선우씨,라고 하는 어쩐지 불편했다. 이상하게 건방진 느낌도 들었다. 4살 많은 대학 선배가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소개해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배에겐 선배나 오빠라고 부르는데 그에게는 꼬박꼬박 이름을 부르자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사실 오빠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남자도 그녀에게 편하게 부르라는 말이 없었고, 본인도 그녀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여자는 두 사람의 데이트가 드라마의 어쩐지 장면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딱딱해, 너무. 다음 달에 있는 친구의 결혼식에서 남자를 소개할 생각을 하니 사실 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쪽은 내 남자친구 선우씨야, 이렇게 말하면 되겠지만 남자를 향한 감정이라던가 두 사람의 관계에 선을 긋는 기분이었다. 남자를 향한 다정한 감정만큼 그를 다정하게 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제는.


  오늘 그들은 이미 와인을 마셨다. 남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 여자는 손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며 입술에 립스틱을 새로 발랐다. 웨이터가 다가와 그녀에게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었다. 이미 한 병은 다 마셨고, 두 번째 와인도 반 정도밖에 안 남았다. 여자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서, 카드를 꺼내고 계산해달라고 했다. 웨이터는 서비스로 샐러드나 치즈를 더 가져다주겠다고 말했다. 여자는 생치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자가 치즈를 잘 먹는 모습을 떠올리며 치즈를 더 가져다달라고 말했다. 남자가 화장실에서 돌아오기 전 치즈가 세팅되었다. 치즈 옆에 과일이 든 초콜릿도 몇 개 놓여있었다.


  남자는 자리로 돌아와 치즈를 보고 그녀에게 물었다.


  - 치즈 더 주문했어요?


  - 서비스로 주셨어요. 샐러드나 치즈는 준다고 했는데- 치즈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다 먹기도 했고.

  여자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남자가 그녀를 따라하며 말했다.


  - 아, 난 일단 주문한 거라서 엄청 열심히 먹은 거였는데. 음, 이건 어떻게 또 다 먹죠?


  둘은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여자는 저녁을 먹을 때를 기억했다. 남자는 여자의 앞쪽으로 반찬을 옮겨 주었다. 여자의 앞에는 무쌈말이, 양념꼬막, 무말랭이, 메추리알 장조림이 놓았다. 여자의 젓가락이 두 번 이상 간 반찬들이었다. 여자는 자신을 섬세하게 챙겨주는 그를 따라하려고 한 자신이 못내 부끄러워졌다. 남자는 귀까지 빨갛게 된 여자의 모습이 귀여웠다. 여자의 뺨은 이미 아까부터 빨갛다.


  두 병의 와인은 깨끗하게 비워졌고, 두 사람의 마음은 한 방울만 더 떨어지면 넘칠 것처럼 가득 차올랐다. 와인바를 빠져나 택시를 잡기 위해 길가로 나섰다. 여자는 자꾸만 넘어졌고, 남자는 그때마다 여자를 붙잡았다.


  - 집이 어디에요?


  - 음, 모자원 고개요. 신림역에서 신대방삼거리역 사이에 있어요. 


  여자는 이미 저녁을 먹은 것까지 게워냈다. 남자가 여자의 입가를 닦아주며 물었다.


  - 주소 뭐예요?


  여자의 표정은 여자에게 남자의 집주소를 아느냐고 물은 것처럼 의아했다. 모르겠다고 답하는 그녀의 말투에서 술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혀가 짧아졌고 눈이 풀렸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르고 그 끝에 이미 졸린 표정이었다.


  - 연아, 그럼 우리 집으로 가도 괜찮아?


  남자는 여자에게 처음으로 말을 놓았다. 연아,라고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가. 외자의 그 예쁜 이름은 늘 연이씨,라고 부르는 게 못내 탐탁지 않았다. 연이라는 한 글자를 오롯이 부르고 싶었는데 그녀는 조금 전 그의 감정을 끝내 모르겠지.


  - 응, 우리 집으로 가야해요. 자기 집 말고 우리 집. 우리 집.


  둘은 택시에 올랐다. 여자는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여자에게서는 알싸한 토냄새가 풍겼다. 남자는 집에 가면 억지로 양치질이라도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너털웃음이 났다. 평소에 말투도 조근조근하고 실수를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의 여자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니 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밤의 공기가 좋았다. 남자는 창문을 살짝 내렸고 여자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머리카락을 묶어주고, 양치질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들어가기 전에 집 앞 편의점에서 유자꿀물을 사줘야지.


  내일은 오늘보다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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