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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19. 2017

닿을 수 없는 사소한 날들

결혼이 사랑만 가지고 되는 건 아니지만, 사랑만 필요한 순간이 있는 거야

  카페에서 지인들과 대화를 하다가 그 대화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음악이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그 노래는 아주 오래 전에 들은 기억이 있는 노래였다. 그리고 불쑥 육 년 전 그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 있잖아, 난 이 곡을 들으면 꼭 자기 같다는 생각을 해.


  가방에서 씨디를 꺼내 오디오에 넣으며 네가 말했다. 트랙을 넘기다 멈춘 건 네번 째 트랙에서였다.


  -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날 사랑하고 있단 

    너의 마음을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날 바라보는 게 아니고 날 바라보고 있단

    너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는 이미 다음 주면 결혼을 한다. 신혼집 계약은 이미 끝이 났고, 침실과 거실의 벽지를 고르며 우리는 함께한 수 많은 날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떨려했다. 주말에는 몰딩을 직접 칠했고, 커튼도 없고 페인트 냄새도 가시지 않은 거실에서 여분의 붓으로 서로의 몸의 은밀한 곳을 간지럽히다 결국 러그도 없는 바닥에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등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 밖에서 보일 거야.


  너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말했다. 너의 작은 가슴이 그 속도에 맞춰 천천히 흔들렸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차가 들어올 때마다 너의 가슴에는 창밖의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문신처럼 새겨졌다 사라졌다.  


  - 그러면 바꿀까, 자리?


  내가 몸을 일으키자 너는 오른손으로 내 가슴을 밀어내렸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나는 사진을 한 장만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한 번도 사진을 허락한 적 없던 너는, 손을 뻗어 그날 오후에 산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내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 바꾸는 건 싫어. 자기도 지금이 더 좋지 않아?


  너의 말끝에 가느다란 신음이 묻어났다. 너의 그 목소리까지 이 사진에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1세기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라니.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뷰 파인더로 너를 보았다. 너는 애써 예뻐보이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왼쪽 뺨에는 장난치다 묻은 페인트가 한 줄 그어져있었고, 하나로 묶고 있던 긴 머리는 거의 풀려 머리끝에 노란 고무줄이 힘겹게 매달려있었다. 오른쪽 가슴 아래의 작은 점, 그리고 그 점을 따라 반 뼘 쯤 내려오면 있는 또 하나의 점, 길게 난 배꼽 그리고.


  - 하, 잠깐만. 한 장만 찍을 거니까, 움직이지 말아봐.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너는 왼손 검지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뺐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손가락을 벌려 곱게 휘어진 눈을 보여줬다. 


  - 그렇게 찍으면 내가 부끄럽잖아. 자기 누워 있는 표정 어떤지 내가 찍어줄까? 자기도 한 번 볼래?

  - 어떤데? 나는 어떤데?

  내 물음에 너는 재밌다는 듯 대꾸했다.

  - 하고 있는데도, 하고 싶어지는 표정이야.


  그 말투와 표정이 귀여워서 나는 웃어버렸고, 셔터가 눌렸다. 그리고 사진이 나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너의 얼굴을 반쯤 감춰버렸지만 어쩐지 슬픈 표정이었다. 


  - 자, 이제 한 장 찍었으니까 됐지?

  - 잘못 찍한 것 같아. 다시 한 장만. 이 사진은 너무 흔들려서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 잖아. 지금 네 표정을 담고 싶어.

  - 안돼.


  그 폴라로이드 사진의 표정처럼 네 말이 슬프게 들렸다.


  - 안돼. 하던 거 마저 하자, 자기야. 난 지금 계속 하고 싶어.


  왜 오늘 몰딩을 다 칠해버렸을까. 학창시절, 미술과목은 수행평가 점수가 엉터리였는데, 몰딩은 왜 이렇게 잘 칠해버린 거지. 반쯤 대충 칠하고 서너 번 더 칠하러와서 너와 이렇게 다정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을 했던 밤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말, 너는 내 차의 오디오에 그 씨디를 넣었다. 오디오가 고장 났더라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까- 따위를 이제와 생각한다.


  무슨 뜻이냐는 나의 말에 너는 짧게 대답했다.


  - 헤어지자는 말이야. 핑계를 대거나 변명을 하거나 욕해도 좋아. 더 잘 알테니까, 이 곡의 의미를.


  그날 저녁,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방에 들어갔고 어머니는 너를 당장 데려오라고 성화였다. 누나는 내 등짝을 찰싹 소리나게 때리며 말했다.


  - 개새끼.


   하지만 예식장을 취소하고, 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내 친구에게 문자메시지까지 보내준 것은 누나였다. 일주일 사이에 5kg이나 빠진 나에게 미역국에 말은 밥을 억지로 먹인 것도 누나였다.


  대화를 나눌 기분이 영 아니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며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 누나, 육 년 전에. 왜 다른 말도 없이 나한테 개새끼라고 했어? 결혼 일주일 전에 파토낸 건 내가 아니었잖아.

  칭얼대는 조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 결혼이 사랑만 가지고 되는 건 아니지만, 사랑만 필요한 순간이 있는 거야.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차를 돌려 큰 길로 나갔다. 음악 씨디를 파는 곳이 어디있을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날 이후의 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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